죽음보다 깊은 사랑

영화 '엘비라 마디간' 리뷰

by 이세일

스무살 시절 나의 전용영화관은 지금은 없어진 화신 백화점 6층에 있었던 화신극장이었다. 동시상영 극장으로 주된 관객은 재수생, 실업자등으로 저렴한 가격에 시간을 때우기 좋았지만 그리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화장실은 냄새가 났고 화면에서는 줄기차게 비가 내리고 어느 날은 필름이 끊겨 관객들의 휘파람 야유가 좁은 극장에 울려 퍼졌다. 주변에 있던 피카디리나 단성사, 허리우드 서울 극장 등이 개봉관이라면 화신 극장은 땡처리 되는 의류처럼 영화가 상영되는 마지막 장소였다. 운 좋으면 떨이 옷 가운데 싼 값으로 마음에 드는 옷 하나 구할 수 있는 것처럼 이 극장에서도 가끔 괜찮은 영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은 화신극장에서 발견한 수작이었다. 배경음악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이라는 것도 몰랐지만 그 아름다운 선율에 반해 한때는 어렵게 구한 LP 음반으로 이 곡을 듣고 또 들었다. 엘비라역을 맡은 여주인공 피아데게드 마르크(Elvira Madigan)의 청순하고 예쁜 얼굴에 반해 20대 시절 올리비아 헛시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로 기억되고 영화 엘비라 마디간은 “사랑은 불륜이다. 아니다”라는 2분법 보다 얼마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가?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는 동기가 되었는데 아직도 그 생각에 큰 변화는 없는 것 같다.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엘비라 마디간을 수십 년이지나 YES에서 구입한 DVD세트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밤에 홀로 깨어 오징어와 땅콩을 간식 삼아 영화를 보는 것은 자신의 오랜 습관인데 특히 로맨스 영화는 깊은 밤에 홀로 보는 것이 감동적이다. 그렇지만 이제 포기할 때쯤 된 것 같은데 아직도 아내의 잔소리는 덤으로 들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엘비라 마디간은 마치 두 사람의 슬픈 사랑을 애도하는 것처럼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를 써내려간다. ‘1859년 스웨덴 육군 장교 카운트 식스틴 스패리. 그리고 덴마크 줄 타는 소녀 엘비라 마디간, 앨리스 헤드비 제슨 덴마크 숲 속에서 자살하다. 이 영화는 실화입니다, 영화는 무거운 분위기속에서 시작되지만 다음 화면은 화려한 영상미를 바탕으로 자연 속에서 잠들어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비록 그들의 사랑은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영화는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줄 것이고 그 사랑에 감동되기에 수십 년이 지나도 모차르트와 식스틴, 엘비라 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스웨덴 귀족 출신의 젊은 장교 식스틴(Lieutenant Sparre: 토미 베르그덴 분)과 서커스단에서 줄 타는 소녀 엘비라(Elvira Madigan: 피아데게드 마르크 분)는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륜의 덫에 걸려 있다. 전쟁을 혐오하던 식스틴은 엘비라 와의 사랑 때문에 아내와 두 아이를 버린 채 집을 나온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귀족과 천민이라는 신분차이 때문에 결혼에 걸림돌이 되고 식스틴은 부대에서 탈영까지 감행한다. 탈영병이기에 취직도 할 수 없고, 엘비라도 서커스단을 나왔기에 더 이상 줄을 탈 수 없다. 이들의 사랑은 결국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비극을 맞이한다. 그러나 이미 사랑에 깊이 빠진 두 사람에게 그런 것은 아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식스틴이 엘비라에게 묻는다.

“행복해?
행복해요 식스틴, 너무 행복해요!“



이때 배경음악으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이 깔린다. 이때부터 영화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자연을 바탕으로 두 사람의 도피행각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묘사한다. 두 사람은 너무 행복하지만 어느 날 두 사람에게 식스틴의 친구가 찾아온다. 그와 함께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며 엘비라와 함께 셋이 식사한 후 계산서가 테이블에 놓인다. 이때 지금도 잊히지 않는 명장면이 있다. 당연히 식사비는 친구가 내야겠지만 식스틴의 초라한 모습을 보기 싫은 엘비라가 자신의 구두에서 마지막 남은 비상금을 꺼내 테이블 밑으로 전해준다. 호기 있게 계산하는 모습을 보며 친구도 그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다. 그러기에 엘비라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진심어린 충고를 한다. 그리고 엘비라에게 당신으로 인해 내 친구와 그리고 그의 가정이 불행해졌다고 말한다. 이때 엘비라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지만 마음 아프다.

자신인 들 모르겠는가?

착한 천성을 가지고 있는 그녀이기에 식스틴의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이제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말하는 식스틴에게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것도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아무리 아름답고 순결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할지라도 그 사랑에 가장 큰 장애물은 식스틴의 아내도 아이들도 아니다. 3각관계의 갈등으로 그려지지 않기에 이 영화가 품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도피 행각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현실적인 이유다. 돈이 없기에 먹을 것도 없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

이때 이 말은 진리다.
결국 두 사람은 배고픔 때문에 들이나 야산에서 열매나 풀을 뜯어 먹다가 토하고 만다. 우리 시대라면 이런 가난 때문에 쉽게 사랑이 끝나겠지만 어리 섞음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사랑은 갈등 속에서도 이어진다.

“사랑에 대해 얘기하지 말아요. 식스틴 사랑만으론 살 수 없어요.”

기분이 상한 식스틴은 화를 내며

“그럼 내가 취직이라도 해야 한단 말이야?”

말다툼을 한 두 사람은 개울 위쪽에 식스틴이 아래쪽에는 엘비라가 앉은 채 말이 없다. 이때 토라져 있는 엘비라를 향해 식스틴이

“용서해 줘”

란 글씨를 쓴 메모지를 떠내려 보낸다. 아래쪽에 있던 엘비라가 발견하고 달려와 식스틴에게 키스한다. 이때도 역시 배경음악은 모차르트 교향곡 21번이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랑이 종착역에 다다른 것을 직감한다. 자신의 머리띠로 집세를 치루고 집을 나선 두 사람은 마지막 소풍을 나선다. 마지막으로 와인 한 잔을 나눈 두 사람. 엘비라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포옹하고 있는 엘비라의 관자놀이에 식스틴의 총구가 겨눠진다.

“할 수 없어”
“해야 해요”

갈등하는 식스틴. 엘비라가 나비를 보고 잡기 위하여 두 손을 벌리며 따라간다. 엘비라가 나비를 잡는 순간. 두 발의 총성이 울린다. 1889년 6월 20일에 끝난 35살의 식스틴과 21살의 엘비라의 아름다운 사랑은 이렇게 비극으로 끝난다. 더군다나 실화이기에 더 아픔으로 다가온다.

우리 시대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사랑으로 치부가 되겠지만 목숨을 던져 자신들의 사랑을 지킨 두 사람의 용기는 존중되어야 할 가치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불륜이라는 것으로 시비를 건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다운 사랑은 대부분 불륜을 소재로 하고 있다. 만남과 헤어짐을 많이 갖은 사랑의 경력을 자랑으로 여기고, 하룻밤의 육체적인 쾌락도 사랑으로 여기는 우리 시대에 이런 고전적인 사랑을 순수함으로 포장하고 싶다. 그리고 가끔 이런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것도 삶의 활력소란 생각을 한다.

운명적인 사랑이 있다.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베르테르와 같이 아프고, 소렐부인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며 따라가야 할 무모한 사랑도 있다. 어쩜 사랑은 베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처럼 골라 먹는 재미가 아니라 감당해야할 아픔이 있고 그 아픔이 클수록 숭고한 사랑이 된다. 우리가 읽어 버린 사랑의 모습 때문에 이런 사랑은 찡한 감동으로 다가오고 공감하며 감동한다.

https://youtu.be/o1j5A-slXO8


Elvira Madigan(엘비라 마디간)-Mozart, Piano Concerto No. 21 K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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