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리뷰

by 이세일

세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아카데미나 칸느와 같은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면 그 권위로 인해 관객들은 당연히 좋은 작품이라는 선입견을 갖는다. 이유는 전문가들에 의해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터널 선샤인’도 그런 작품 중 하나다. 58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과 편집상을, 7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것을 보면 이 영화의 힘은 시나리오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상은 못했지만 케이트 윈슬렛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가볍고 웃기는 코미디 연기로 입지를 굳히던 짐 캐리는 이 영화를 통해 연기 패턴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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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첫 장면, 침대에 누워있는 한 남자의 표정이 보인다.


수염이 얼굴을 덮었고 퀭한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다. 마치 환자인 듯한 힘없는 목소리 때문에 난 그가 짐 케리인 줄 몰랐다. 지독한 실연의 아픔으로 인해 삶을 포기할 단계에 이른 모습을 보며 사랑이 얼마나 잔인하게 한 남자의 육체와 영혼을 망가트리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다가 쏟아지는 졸음으로 인해 두 번이나 실패하고 말았다…….ㅠㅠ 정신 차리지 않으면 많이 헷갈린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사랑은 과거와 현재를 정신없이 넘나들고 곁다리로 매리(커스틴 던스트), 스탠(마크 러팔로), 패트릭(일라이자 우드)의 이야기도 끼어들기에 돌려보기를 몇 번해야 한다. 그러나 영화의 첫 장면만 바로 이해한다면 줄거리는 간단하다. 조엘(짐 캐리)이 병자의 모습을 하며 힘들게 잠자리에서 일어난 이유는 그가 사랑했던 여자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과의 아픈 사랑을 의학의 힘을 통해 기억에서 지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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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사랑이 힘들고 아팠으면 기억에서 지웠을까?”


이 질문이 영화를 이해하는 키워드다.

힘들게 잠에서 깬 조엘은 출근행 열차를 기다리다가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몬토크로 행선지를 바꾼다. 영화는 그가 왜 몬토크행 열차를 탔는지 설명하지 않기에 이때부터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영화평을 봤기에 고비를 넘겼다. 몬토크는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과의 사랑이 추억으로 남아있는 장소다. 의학의 힘을 통해 그녀와의 사랑을 모두 지웠다고 하지만 어렴풋하게 그 흔적이 가슴에 남아있는 것이다. ‘기억은 지워도 사랑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란 영화 포스터의 카피 글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이해가 된다. 강물은 앞을 가로막는 큰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빨간 신호등을 보고 차들은 일제히 정지한다.

“사랑도 이처럼 순리적이고 질서 있게 움직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바람은 사랑을 해 본 사람에게 가장 절실하게 다가오는 기도의 제목이리라. 그러나 사랑은 질서나 순리와 같이 이성으로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폭발물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기에 생명을 걸기도 하고 사랑의 아픔 때문에 상사병에 걸리기도 한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의 사랑도 그랬다. 그들은 미친 듯이 사랑했고 서로를 탐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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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에게 남은 것은 서로에게 준 상처뿐이었고 외로움은 저녁 햇살을 받아 길게 늘어진 가로수 그림자보다 길었다. 그 상처와 아픔이 얼마나 컸으면 클레멘타인이 먼저 조엘과의 사랑을 지웠을까?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엘도 열받아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클레멘타인을 지워 버린다. 이제 타인으로 돌아간 그들은 철저한 남남으로 남는다. 길거리에서 마주친다 할지라도 알아볼 수 없고, 뜨겁게 마주쳤던 두 입술의 열기도 기억할 수 없다. 의학적으로는 완전한 타인이 되었지만 사랑의 힘은 그보다 위대하기에 조엘은 희미한 기억을 찾아 몬토크행 열차에 오른다. 이것은 클레멘타인도 마찬가지다. 조엘이 탄 열차 속에는 이미 클레멘타인이 타고 있었는데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사랑의 힘이다. 확실하지 않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도 어렴풋이 조엘 과의 추억이 남아있다. 과연 두 사람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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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랑은 가슴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믿지만 진화생물학은 사랑을 뇌에서 분비된 화학반응의 결과로 해석한다.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낄 때는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고 상대에 대한 그리움과 두근거림은 페닐에틸아민이라는 물질이 분비되기 때문이고 옥시토신은 사랑을 안정적으로 가져간다는데 문제는 이 호르몬이 길어야 3년밖에는 분비가 안 되기에 감정적으로 느끼는 사랑의 시효는 3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기억을 지웠다 할지라도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사랑을 느낀다. 그러기에 그들은 다시 만나고 사랑이 시작한다. 그들의 사랑은 처음과 다르지 않다. 이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클레멘타인은 조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개념 없는 여자예요. 난 완벽하지 않은 여자예요.”

조엘은 대답은 간단하다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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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어떤 아픔, 상처,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상대를 향해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다면 사랑이 식지 않은 증거가 된다. 그러기에 이 영화의 여운은 길게 남는다. 이때 김광석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은 너무 아픈 사랑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그립던 말들도
묻어 버리기
못 다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영화는 너무 아프기에 사랑이라고 말한다. 아픈 사랑, 그것이 사랑의 본질임을 믿기에 단연코 진화생물학을 반대한다.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 변하지 않는 사랑의 진리다.


배경음악은

이터널 선샤인 ost 중에서 "Everybody's Got To Learn Sometime"입니다.


https://youtu.be/r8Mc979Z1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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