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네 번의 비행으로 14,200km
대한민국 인천에서 카타르 도하까지 10시간 10분, 도하에서 노르웨이 오슬로까지 6시간 55분, 오슬로에서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 스피츠베르겐 섬 롱이어비엔까지 2시간 55분. 롱이어비엔에서 이틀 동안 사전취재를 하고, 니알슨으로 가는 30분의 비행. 약 14,200km를 이동하는데 대기시간까지 모조리 합해 36시간을 채워야 했다. 멀다고 생각은 했지만 숫자로 확인해 보니 멀어도 너무 멀었다. 이동만 3일이 빠지는데, 밤낮까지 계산하면 실상 북극에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출발 전 일정을 확인하면서, 부지런히 움직여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오겠노라 다짐했다. 여행의 흔적이 담긴 은색 중형 캐리어 하나를 끌고, 쿠팡 봉지에서 갓 나온 아이보리색 경량 나일론 백팩을 등에 멨다. 몽골에 다녀온 친구가 선물해 준 낙타 인형을 달고, 작은 복층 방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북극까지 가는데 짐이 다소 단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니알슨으로 들어가는 경비행기에 탑승할 때 개인 짐은 20kg으로 한정된다. 추가 신청을 할 수는 있지만, 편도 추가 1kg당 100kr, 한화로는 약 14,000원 정도의 금액이라 되도록이면 맞춰 가는 것이 좋다. 개인 짐 20kg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취재팀의 일원으로서 카메라와 부속 장비들을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게다가 극지 연구소에서 대여한 피복이 캐리어 한쪽을 거의 다 채울 만큼의 부피여서 실상 여벌 옷 같은 건 챙길 수 없었다. 다행히도 롱이어비엔에 묵을 때는 숙소마다 빨래를 할 수 있어서 세탁 날짜를 계산해 나흘 치 짐만 챙기기로 했다. 그것도 나름 여유분을 생각한 것이었다.
부담이 되는 긴 여정에 짐을 간소화하면 걱정이 늘어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았다. 몸이 가벼우니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미 즐길 준비를 마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걱정했던 어제와 설레는 오늘이 가끔 지킬 앤 하이드 같지만, 그것이 대술까. 이미 여정은 시작되었는 걸. 하지만 어쩐지 꼭 한 가지 빼먹는다. 공항에 도착해야만 알아차릴 수 있는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것 같다. 장장 10시간을 가야 하는 첫 비행의 체크인을 잊어버린 탓에 좌석번호가 무려 30B, 31B, 32B. 탑승하기 직전까지 무슨 기차놀이 하느냐며 투덜거렸지만, 착석하고 나니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래, 따로 떨어져 앉는 것보다는 낫지. 앞뒤도 나름 안정감이 있네.’
양쪽 어깨와 두 다리는 조금 다소곳해졌지만 밤비행이니 기절하면 그만이었다. 이럴 땐 정말 머리만 대면 잠드는 것이 축복이라며… 설렘에 지배당한 채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카타르의 수도, 도하였다. 석유와 천연가스를 기반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중동 국가라 그런지 하마드국제공항에 내리자마자 호화롭고 쾌적했다. 환승시간 때문에 공항 구경도 못하고 달릴 생각에 아쉬울 정도였다. ‘두세 시간이면 넉넉하겠지.’라고 생각했던 그동안의 환승을 돌아보면 터미널 끝과 끝을 셔틀버스나 트램으로 가야 하기도 하고, 보안 검사는 병목현상이 심했고, 터미널 이동 탓에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방송으로 이름 석 자를 듣고 나서야 숨을 헐떡대며 마지막 손님으로 비행기를 탑승했던 기억 때문에 환승에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왜 벌써 게이트 앞이지?’
하마드국제공항은 단일 터미널 구조라서 환승할 때 다른 터미널로 갈아탈 필요가 없다. 2014년 개항 당시 ‘환승허브’가 목적이라 이에 맞게 동선 설계를 최적화했다고 한다. 탑승동이 5개로 나뉘어 있었지만 혼동할 구석이 없었다. 탑승동 입구마다 거대한 알파벳이 빛나고 있어서 저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다. 보안점검도 손이 빠르고 효율적이어서 국내에서 입국심사받는 속도로 빠져나왔다. 환승허브답게 유동인구가 엄청났지만 우리가 환승하는 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계에서 첫 번째로 오픈했다는 오레오 카페에서 여유롭게 2시간 동안 카페인과 당을 섭취하고 노르웨이 오슬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슬로 가르데르모엔 국제공항에서 6분 거리에 숙소를 하나 구해두었다. 16시간 뒤, 롱이어비엔으로 가는 환승비행기를 공항에서 기다리기엔 너무 고된 일정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아 공항 2층에서 우버를 불러 숙소로 향했다. 공항을 오가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노르웨이에는 유난히 고급 전기차가 많고 심심찮게 우버로도 이용되었다. 전기차 중심의 정책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전기차 보급률이 가장 높기 때문이었다. 고급 전기차를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데다 차량 유지비나 세금도 높지 않고, 여러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택시 서비스도 기본적으로 차량 수준이 높아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가 있어서 품질이 좋은 차로 운행하고, 고급차를 잘 관리해서 오래 타는 문화가 퍼져 있었다.
좋은 차로 편안하게 도착한 숙소는 한적한 시골 농장이었다. 붉은 페인트가 칠해진 커다란 마구간의 말이 푸르르 소리를 냈다. 숙소를 예약할 때는 몰랐지만, 지도에 승마시설로 분류되어 있었다. 말들이 머무는 야외 펜스에 그늘 쉼터를 만들어주는 커다란 나무, 오래된 캠핑카 옆에 운치 있는 하얀 오두막집, 드넓은 황금빛 밀밭 풍경이 펼쳐진 평화로운 곳이었다. 처음에는 생각했던 숙소의 모습이 아니라 잘못 들어온 줄 알았지만 이내 주인과 통화를 하고 이번 일정의 첫 숙소에 입성했다.
회색빛 흐린 하늘에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씻고 인근 시내에 나가서 식사를 하려고 했지만, 오랜 비행의 피로와 비 오는 풍경이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혹시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고 찾아보다 푸도라(Foodora)라는 평이 좋은 배달 어플을 발견해 배달비와 왕복 택시비를 비교해 보았다. 결국 적당한 수제 햄버거집을 찾아 주문을 하고 17시간의 비행 피로를 씻어내기로 했다.
개운하게 씻고 나와 버거 포장을 풀었는데, 주문했던 음료가 하나도 오지 않았다. 매장에서는 다시 배달하기 어려우니 어플에서 부분환불을 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하지만 시스템 사용이 익숙하지 않아 고객센터와의 연결이 한 번 끊겼는데, 그 뒤로 다시 연결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해결하지 못하고 탄산 없이 뻑뻑하게 비싼 버거를 먹어야만 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걱정했던 것 중 하나는 음식이었다. 환경이야 당연히 극지이니 힘들 수밖에 없겠지만, 음식이 맛이 없다는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잘 먹고 잘 자야 힘든 일정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다이어트한다고 생각하고 정신력으로 버텨야지…’ 했지만, 첫 끼니부터 삐걱거리자 괜스레 시무룩해졌다.
그때 피디님이 결단을 내렸다. 물가도 비싸고, 새벽에 일찍부터 움직여야 하고, 기온이 15도로 떨어지니 내일 아침은 컵라면이 좋겠다고. 만일 극지에 가게 된다면 예쁜 옷 한 벌 보다 컵라면을 하나라도 더 챙기는 것이 좋다. 해외에 나갈 때 라면을 챙기는 편이라면 평소보다 한두 개라도 더 챙기길. 들고 들어가지 않으면 구입할 수 있는 곳이 없다. 스발바르 마트에서 살 수 있는 라면은 매운맛이 전혀 없는 라면이니까. 인당 2개밖에 가져오지 않은 비상식량이었지만, 피디님의 제안은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졌다.
저녁 8시, 아직 해가 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암막커튼을 치고 낯선 침대에 누웠다. 새벽 4시에 알람을 맞추고 안대를 착용했다.
‘이동만 했는데 왜 이렇게 힘이 부치지… 앞으로 일정을 대체 어떻…’
새벽 3시였다. 걱정을 할 틈도 없이 7시간을 기절해 버린 것이었다. 안대는 언제 내팽개쳤는지 맨눈이었다. 고약한 잠버릇에 남아날 날이 없는 안대를 더듬더듬 찾아 챙기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 벌써부터 일어나 일을 하고 있는 피디님과 아침인사를 나누고, 미리 준비를 마쳤다.
짧은 밤이 지나고, 어스름이 피어나는 하늘에 산책을 나왔다. 마구간에서 휴식을 취하던 말과 눈이 마주치자 문을 발로 툭툭 쳤다. 꺼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고는 지나쳐 길이 나 있는 곳으로 걸었다.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밀밭이 보였고, 트랙터가 길을 이어두었다. 깊게 갈 수는 없었지만 잠시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전환이 되었다. 밀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향초가 올라간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향초를 켜고, 차 한 잔을 마시며, 자연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렸다. 상상만 해도 낭만 한도초과였다.
낭만을 뒤로하고 우리는 모닝 컵라면을 뚝딱했다. 보통 아침라면은 해장에 가까웠는데, 타지에서 먹으니 사골인 듯 몸보신에 가까웠다. 행복은 정말 별게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일상을 귀하게 여기며 감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나 이런 사소한 상황에서 마주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깊은 깨달음을 얻고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다음 목적지는 3시간 거리에 있는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 스피츠베르겐 섬 롱이어비엔이다. 같은 노르웨이라고 여기고 국내선 수속 1번을 생각하고 가면 늦을 수도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스발바르 제도는 본토와는 다른 국제조약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본토는 유럽 국가 간 국경 검사를 없애고 하나의 국경처럼 공동 관리하는 협정인 ‘쉥겐 조약’이 적용되지만, 스발바르는 비적용 지역으로 별도 출입국 지위를 가지기 때문에 절차가 발생한다.
국내선으로 들어가서 수속을 마치고 나면, 면세점도 둘러보고, 허기도 채우고, 스타벅스에서 시그니처 티라미수 크림 아이스 라테도 마시는 유혹이 기다리고 있다. 유럽인이 아니라면 수속 줄이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적당히 여유 있는 시간을 두고 두 번째 수속을 하러 가기를 바란다. 모든 절차를 마쳤다고 생각하고 스타벅스에서 수다를 떨다가 비행기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정말 쫄깃한 경험이었다.
이제 정말 북극으로 들어선다.
북위 60도 오슬로에서 북위 78도 롱이어비엔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