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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빙하낙하

by 윤진

막연히 북유럽을 가보고 싶었다. 빙하에 깎여나간 땅 위로 물이 올라 절경을 만들어내는 피오르드 해안에서 배를 타고 풍경을 바라보는 상상을 꽤 오랫동안 했던 것 같다. 몇 년 전, 뉴질랜드 여행을 갔다가 배를 타고 피오르드로 가는 여행상품을 예약한 적이 있었다. 다른 여행자들에게는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피오르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가 나무에는 벚꽃이 피고 산에는 눈이 쌓여있는 신비로운 계절이었는데 그 아름다움을 다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나 보다. 유난히 추운 겨울을 보냈는지 피오르드 입구에 얼음이 얼어서 배가 들어갈 수 없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쉽게도 배는 퀸즈타운의 증기선으로 만족해야 했다.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춤출 만큼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씨였지만 선상에 나가 구름과 안개로 덮인 풍경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아주 멋진 피오르드를 보게 되겠지?’


북극에 와서 한참을 눈치채지 못했다. 롱이어비엔이 100km쯤 되는 이스피오르드(Isfijorden)의 남쪽 지류 아드벤트피오르드(Adventfjorden)의 남서쪽 해안에 있다는 사실을. 7km쯤 되는 작은 피오르드 안에서 며칠을 먹고 자고 한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극지 아카데미 학생들과 함께 제7탄광을 갔을 때였다. 롱이어비엔에 처음 왔을 땐 바나클 거위와 북극제비갈매기의 둥지 근처에 있던 북극곰 표지판 앞을 서성이기만 했다. 총기를 소지하지 않았기에 그 선을 넘어갈 수 없었는데, 이번엔 차를 타고 표지판을 너머 한쪽으로 뻗은 길을 따라 달렸다. 평지를 달리다 눈앞에 가까워진 산을 구불구불 올라가면 우리가 달려온 길이 훤히 보이는 높이에 도달한다.


차에서 내려 탄광과 주변 풍경을 촬영하는데,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지질학 박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U자 피오르드 안이에요.”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시야를 넓게 보았다. 그제야 선명한 U자가 눈에 들어왔다. 물이 완전히 차오른 형태가 아니라 바다까지 그물망 형태로 흐르는 망상하천의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만 생각해 보아도 주변에 빙하 천지인데 피오르드로 둘러싸여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머쓱했고, 아무도 나의 이야기를 모르는데도 혼자 창피했다.


U자 피오르드 안에서


인식하고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북극에 오기 전, 극지 연구소에서 박사님들의 사전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때 들었던 키워드가 있어 적어두고 미리 공부를 했다. 하지만 니알슨에서의 첫날, 빙하를 보러 가던 길에 아무것도 모른 채 걷고만 있던 우리에게 박사님이 바닥을 가리키며 일러주셨다. 우리가 밟고 있는 것이 다각형 구조토, 폴리곤(Polygons)이라는 것을. 폴리곤은 툰드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벌집 모양의 땅인데, 땅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만들어낸 자연 현상이다. 밟고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저 돌과 이끼가 있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폴리곤이었던 것이다.


땅을 보며 걷다 보면 또 하나 보이는 것이 있는데, 누군가 바위를 일부러 깬 것처럼 바스러져 있거나 칼로 자른 듯 금이 가 있었다. 이것도 폴리곤이 만들어지는 이유와 비슷한데, 돌에 미세한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들었다가 얼면 부피가 늘어나 돌을 갈라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현지에 가기 전에 사전조사를 하고 가는데도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으면 지금처럼 눈앞에서 놓치기 일쑤다. 그런 면에서 박사님들과 함께 직접 자연현상을 눈으로 보고 느끼며 설명까지 따라붙는 극지 아카데미 아이들의 경험이 너무도 값지게 느껴졌다. 이론 뒤에 현장경험이 따라와 준다면 그보다 좋은 공부는 없을 것이다.


왼쪽은 패턴이 보이는 땅 구조토, 오른쪽은 물이 얼어 깨뜨린 돌


그중에서도 아이들에게 강렬했던 현장경험이 하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빙하가 사라진 땅에서 생기는 현상을 관찰하고, 그곳에 피어난 식물을 채집하는 것을 아주 즐거워했지만, 이틀 뒤 미디어팀이 탄광 취재를 간 사이 극지 아카데미는 피라미덴 인근으로 빙하를 보러 간 모양이었다.


피라미덴은 스발바르에서 석탄을 채굴하던 소비에트 연방의 버려진 도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을 위해 막대한 자원이 필요했던 소비에트 연방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았던 피라미덴에서 석탄을 채굴하기 시작했다. 다른 광산 마을도 기본 생활 수준이 노르웨이 정착촌보다 높았지만, 피라미덴은 유토피아라고 부를 만큼 독보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90년대 러시아 경제가 어려워진 데다 석탄 매장량도 전과 같지 않고 그에 따라 보조금도 줄었는데, 하필 1996년에 러시아에서 출발해 스발바르로 향하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비행기에 탑승한 승객 대부분이 피라미덴과 인근 광산 정착촌의 주민들이었고, 인적자원의 급격한 감소와 정신적 타격으로 인해 피라미덴은 결국 문을 닫았다.


온도가 낮은 환경이라 부식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지 오래전 소비에트 연방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관광지로 복원되었다. 하지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이곳은 다시 유령도시가 되었다. 외부에서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지만 노르웨이 공식 관광 위원회 비짓 스발바르(Visit Svalbard)를 포함한 다수의 여행사들이 보이콧을 시작했다. 관광을 통해 발생하는 수익으로 전쟁자본을 대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피라미덴 땅을 밟지 않는다는 것이지 배 위에서 멀찌감치 나마 볼 수는 있는 것 같았다. 본래 피라미덴에 갈 때도 롱이어비엔에서 배를 타고 가야 한다. 전엔 관광 목적이 피라미덴을 방문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인근 빙하를 보러 가는 것이 되었다.


극지 아카데미 학생들은 피라미덴 근처의 노르덴셀드브렌(Nordenskioldbreen)이라 불리는 빙하를 보러 갔고, 그곳에서 빙하를 촬영하러 오는 미디어팀들이 내내 기다려서도 포착하기 힘들다는 빙하가 갈라져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것을 빙하낙하, 칼빙(Calving)이라고 부른다. 니알슨에서 생태학 박사님과 이야기를 할 때 칼빙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연구를 하면서 종종 빙하가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마치 멀리서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콰앙-! 하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곤 했다고. 그런데 빙하가 점점 후퇴하면서부터 그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며 슬픈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장면을 아이들은 직접 본 것이다.


우리 미디어팀도 니알슨에서 타이스텐이란 배를 타고 빙하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블룸스트란브렌(Blomstrandbreen)과 콘웨이브린(Conwaybreen)이었는데 직접 칼빙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콘웨이브린에서 빙하를 촬영하다 조금 멀리서 들려오는 콰앙-! 하는 소리를 들었다. 멀리서 들려서인지 폭탄보다는 총소리처럼 들려왔다. 실제로 보았으면 더 놀라고 무서웠을 것 같다. 빙하와 연결된 땅에서 폭포처럼 물이 흐르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후변화의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실제로 본다면 잠을 자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아직도 그 소리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왼쪽은 블룸스트란브렌 빙하, 오른쪽은 빙산


제7탄광에서 조금 더 위로 걸어올라 가면 낮에도 오로라를 관측할 수 있는 셀 헨릭슨 오로라 관측소(Kjell Henriksen Observatory)가 나온다. 내부에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근처까지 올라가 하늘을 보고 있는 두 개의 망원경과 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특별히 관찰을 하거나 설명을 듣는 시간이 아니었기에 조금은 느긋하게 촬영을 하며 극지 아카데미 학생들의 재잘대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들은 일정 내내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때 피라미덴 인근으로 빙하를 보러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탄광투어 일정을 대신해 그곳에 가고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탄광투어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참으로 북극곰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롱이어비엔에서 피라미덴까지는 약 3시간 정도 배를 타고 가는데, 다녀오는 동안 해양생물들을 꽤 많이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때 저 멀리 북극곰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극지 아카데미 학생들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여기저기 출몰했다고 하던데 생각만큼 볼 수 없다는 게 괜스레 아쉬웠다. 그래서 실제로 보는 건 목숨을 위협받는 일이니 아쉬워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몇 년 전 마을 인근 캠핑장에서 프랑스 관광객이 북극곰에게 습격을 받은 이야기도 들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팔을 크게 다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총을 맞은 곰은 도망을 갔지만, 사람에게 해를 가했기에 추적 끝에 사살됐다. 안타까웠지만 북극곰은 워낙 지능적이라 한 번 사람을 먹이로 인식하면 계속해서 찾아온다고 한다. 우리는 그 캠핑장에 식사를 하기 위해 들렀다가 그 이야기를 들었다. 괜히 주변 경계를 하게 됐지만, 그 사고 이후 캠핑장 주변에 전류가 흐르는 울타리를 세워 관광객들을 보호하고 있어 안전했다.


열댓 명쯤 들어갈 수 있는 텐트에 둘러앉아 전투식량을 받았다. 연구로 인해 밖에 오랫동안 나와 있다 보면 끼니를 고민해야 할 때가 있다고 한다. 니알슨에서는 식사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식사시간을 기준으로 일정을 짰다. 하지만 만일 멀리 나가거나 중간에 숙소에 들르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 전투식량이 요긴했다. 보온병에 물을 담아 동결건조된 식량만 챙기면 빙하 위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다. 아시안 커리, 케밥 스튜 등 다양한 맛이 있었는데 일행과 서로 다른 맛을 먹어보기 위해 나는 콩을 넣은 칠리스튜를 골랐다. 뜨거운 물을 충분히 담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스튜가 완성된다. 이건 분명 집에서 먹으면 맛이 없을 것 같은데 바람이 부는 쌀쌀한 날씨에 밖에서 활동을 하고 텐트에서 먹으니 한 봉지를 뚝딱 해버렸다.


야외에 나갈 때는 전투식량을 구비하자… 메모…


이 전투식량은 다음 날 화석탐사를 갈 때 다시 등장하는데, 실은 전날 먹어보고 전투식량을 굳이 받지 않았다. 화석탐사가 늦게 끝난다고 해도 식사를 조금 늦게 하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석을 탐사하던 돌무더기에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고, 주머니에 쟁여두었던 초콜릿으로 허기를 달랬다. 그때 전투식량이 생각났다. 맛이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 먹는 거구나. 왠지 절실해져 버려서 야외활동이 잦은 취재에는 하나씩이라도 구비해 놓겠다 다짐했다. 어깨가 축 처진 뒷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는지 극지 아카데미를 인솔하는 선생님들이 가지고 온 과일을 나누어주셨다. 그때 먹은 사과가 정말 꿀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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