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시계태엽이 반대로 감긴다. 과거에 머문다. 아직 풀지 못한 숙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상을 자주 하다 보니 현재의 나를 자꾸 까먹게 된다. 다시 한번 상기하고 넘어가자.
"39세. 자취 경험 2년 차 캥거루족 출신, 대출받아 전세, 미혼, 계약직, 남성, 평균 이하 소득"
그렇다. 청년기본법상 만 34세까지라는 청년의 연령을 훌쩍 뛰어넘었다. 일부 조례에서는 만 39세까지라고 청년의 범위를 정하고 있으므로 39세는 중년으로 넘어서는 시기가 분명하다.
중년. 절정에 이렀던 해가 저물어가는 시기인 중년은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나이에 가깝지만, 최대 2년까지로 근무 기간이 정해져 있는 나는 한시 계약직이자 막내의 신분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집안의 막내이자, 프로이직러로써 신입의 역할을 도맡았던 나는 경력의 덕목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경력이 낮을수록 가벼워야 한다. 머리는 업무 지식이나 구조, 회사 환경을 익히기 위해 비워놓아야 한다. 엉덩이는 공중에 반쯤 떠 있어야 한다. 의자는 관상용일 뿐, 기마 자세를 유지하며 상사의 부름에 용수철처럼 튀어나갈 대비를 해야 한다. 손은 잽싸야 한다. 주어진 일은 작은 단위라도 첫인상에 영향을 끼친다. 복사라면 복사, 파쇄라면 파쇄, 청소라면 청소 무엇이든 분명하고 정확하게 처리해야 한다.
가정과 사회 경력을 포함하면 눈칫밥 생활도 39년 차이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사람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한 능력을 하나 꼽으라면 비위 맞추기를 고르고 싶다. 상사의 기분에 맞춰서 손바닥도 비비고, 허리도 굽히고, 웃어젖히는 능청스러운 행동이 능력보다 우선되는 현장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이다.
누구는 정수리를 드러내며 빗자루질하고 있는데, 누구는 호호거리며 상사와 커피를 마신다.
누구는 상사가 시킨 일 때문에 밤이 늦도록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누구는 상사와 콧노래를 부른다.
생각만 해도 여전히 화난다. 그러나, 입을 다물고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는 것으로 분노를 대신한다.
살아가다 보면 비위를 맞추는 게 체질이 아니더라도, 그래야 할 것 같은 상황에 놓이고는 한다. 나도 그랬다. 최근 상담을 하다가 턱을 괴는 내 반응이 게임 속 심즈 캐릭터 같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말하는 걸 듣다 보면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가 떠오른다는 얘기마저 들어보았다. 영혼이 나간 듯한 리액션을 일삼는 나조차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나는 당시 훈련병에서 갓 이등병이 된 신입(?)이었다. 그러니까 이등병이 된 지 며칠 되지 않았고, 발령받은 부대에서 방 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날을 맞았다. 부대에서 민속놀이 대회가 열렸다. 종목은 제기차기. 방별로 세 명씩 팀을 이루어 제기를 차고, 합산한 기록으로 우승한 팀에게 포상 휴가를 준다고 했다.
나는 임시로 배정받은 생활관, 통칭 일 생활관으로 불리던 곳에 꼽사리처럼 끼어 대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부대 복도에는 각 생활관에서 나온 선임들이 즐비해 있었다. 제기 찰 공간을 가운데 비워 두고 원을 그리듯 모여 있었다. 간부는 병사들이 만든 원의 중심에서 생활관을 호명했고, 차례가 된 생활관 구성원들이 나와서 제기를 찼다.
"일 생활관 참가자들 앞으로 나와"
간부가 호명했다.
제기가 쥐어졌다.
손을 움직이며 무게를 가늠해 보던 나는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하나, 둘, 셋... 백사십이.. 백사십삼.."
허공으로 뜬 제기가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백오십에 가까운 숫자가 불렸다. 현장에는 감탄하는 이들과 탄식하는 이들로 뒤섞였다. 군중들 틈으로 '저걸 어떻게 이겨'하는 감상은 비교적 또렷하게 들렸다. 제기가 제 몫을 다하고 비로소 움직임을 멈추자, 일 생활관 선임들은 나의 어깨를 감싸며 천장을 향해 방방 뛰었다. 나도 덩달아 뛰었다.
이제 막 22살이 된 까까머리 청년이었던 나는 선임들이 그토록 제기차기에 열광하는 이유를 몰랐다. 후방에 있던 우리 부대에서는 포상 휴가가 희소했다. 이 일은 정식으로 배정될 생활관 선임들이 포상 휴가를 받을 기회를 빼앗은 셈이 되었다. 2년간 생활할 방을 배정받은 후, 몇몇 선임들에 의해 험상궂은 분위기 속에서 회자되곤 했다.
나의 활약으로 한 선임이 포상휴가를 받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임시 생활관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통기타를 치는 선임을 따라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다. 물론, 원해서 했던 건 아니다. 내키지도 않았다. 나는 음치임에도 불구하고 선임을 따라 가수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불렀다. 그야말로, 열창했다.
"수호야. 너.. 일부러 화음 넣는 거 아니지?"
선임은 물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춤을 춰보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그룹 빅뱅의 '마지막 인사'를 췄다. 대학교 2학년 시절, 장기자랑 무대에서 동기들과 췄던,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유일한 춤이었다. 고장 난 기계가 삐걱거리 듯 움직이는 자태를 보며 선임들은 폭소했다.
부대에서 춤꾼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지나가다 마주치는 초면인 선임들이 자기를 아냐고, 뭐 하는 사람일 것 같냐고, 잘 생겼냐고 물어보는 와중에 춤을 춰보라고 했다. 나는 이등병 중에서도 막내인, 그야말로 졸병이었으므로 선임이 어떤 말을 하든 굽신거리며 조아렸다. 춤은 서비스였다. 요청하면 췄다. 어떻게든 췄다.
춤을 난발하던 행동이 무대로 나서게 되는 계기가 될 줄은 몰랐다. 부대 내 식당에 모여 회식을 하는 자리였다. 시기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여전히 막내였다. 식당에는 대대장이라는 비교적 높은 계급의 간부가 함께 있었다. 삼겹살이 식판에 담겨 있었고, 막걸리가 있었고, 음악이 흘렀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어느 간부가 마이크를 몇 차례 손바닥으로 두들기더니 장기자랑할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정적이 흘렀다. 음악조차 멈추어 있었다.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켰을까. 한 선임이 "수호 너 춤 잘 추잖아, 네가 나가서 추는 거 어때, 여기요! 춤 잘 추는 애 있어요!"를 멈추지 않고 말했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식당 한가운데에 선 나는 선임들과 간부들 앞에서 춤을 췄다. '마지막 인사'가 식당을 가득 메웠다. '사랑하고 있는데' 하는 가사가 나올 때는 대대장에게 하트를 날렸다. 대대장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뼉 쳤고, 좋아하는 대대장을 보는 다른 간부들도 좋아 보였다. 선임들은 환호했다. 열광적인 호응에 쑥스러우면서도, '추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설픈 몸짓에도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니 기쁨이 샘솟았다.
"오, 수호. 역시! 술 한 잔 받아라"
"야야, 안주도 잘 챙겨 먹어야지"
"아, 수호. 아주 웃기네"
어리바리하고 굼뜨던 나를 눈치 주던 선임들이 반겼다. 그들의 환대를 그 순간만큼은 왜인지 누릴 자격이 있다고 나는 여겼던 것 같다. 그들이 따라주던 술과 싸주던 고기쌈과 어깨를 두드려 주던 손이 나는 그저 좋았다.
돌아보면, 사람들은 태도를 중요시하는 듯하다. 사람들은 내가 제기를 잘 찰 거라고, 노래를 잘 부를 거라고, 춤을 잘 출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키는 일에 대하여, 그것이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라도, 선임들은 다만 해보려고 하는 모습을 바랐던 것 같다.
이등병 때 나는 때로 진지하고, 때로 서툴고, 때로 우스꽝스러웠다. 선임들은 만능 버튼을 누르듯 나에게 뭔가를 요구했고, 나는 판단하지 않고 우선 했다. 뭐가 나오든, 이후 상황이 어떨 것 같든 하고 봤다. 비록 선임들이 좋아할 만한 행동을 먼저 하지 못하던 나였지만, 이를 테면 잘생겼다든지, 인기 많아 보인다든지 하는 말을 입에 담지는 못했지만, 도전하려고 하는 자세만큼은 선임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나에게 안 한다는 보기는 없었다. 못 한다도 없었다. 했다. 하고 말았다!
무대 경험이 쌓이다 보니 말을 잘하고, 재주가 많다는 얘기를 회사에서 듣기도 했다. 축제나 행사의 진행을 담당하기도 했다. 대학교 1학년 때만 해도 출력한 대본을 줄줄 읽으며 발표했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가슴에 대나무꽃 두 개를 단 대대장을 향해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렸다. 로봇처럼 반응하는, AI의 현존인 내가 말이다.
앗, 생각해 보니 3살 즈음 관광버스 복도에서 춤을 춰서 어른들이 예뻐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초등학생 때는 교실에서 그룹 SES의 춤을 남성 삼인조로 췄던 적이 몇 번 있었다.
회사에서는 장기자랑으로 크레용팝의 '빠빠빠'를 몇몇 직원들과 춘 적이 있었다.
어라. 이거 완전.. 춤꾼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