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보고 싶다"
가끔씩 여자 친구가 혼잣말처럼 내뱉는 말이 있다. 엄마를 보고 싶다는 말. 처음 그 말을 들을 때 남자 친구인 나는 혼란스러웠다. 가족이라 하더라도 나와 함께 있는데 다른 누군가가 보고 싶다니. 나의 존재가 여자 친구의 마음을 채우기에는 부족한 것인지 생각하기도 했다.
연예 기간이 쌓이고 나서, 나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매일같이 보아왔던, 집으로 돌아가 곧 만날 사이라도 보고 싶을 수 있다는 사실을.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나는 여자 친구를 생각하곤 했다. 좋았거나 좋지 못했던, 그 날 함께 보냈던 시간에 가졌던 감정들을 상기했다. 집에 도착할 즈음 도달했던 결론은 항상 '보고 싶다'였다. 좋았어서 더 함께 있고 싶고, 안 좋았어서 만회하고 싶은 마음은 나를 그녀에게 향하도록 만들었다. 출근할 때에도, 업무를 할 때에도, 퇴근을 할 때에도, 누군가와 만나 술 한잔 할 때에도.
특히 좋은 경험을 할 때면 더욱 떠올랐다. 맛있는 밥을 먹을 때,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할 때,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함께 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그녀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대체 불가능한,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인 유일한 사람. 그녀에게 있어 어머니의 존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랬기에 나와 함께 있어도 보고 싶다는, 당연한 말을 했을 거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매 순간 변화한다. 가정 내에서, 직장 내에서, 모임 내에서 매 초마다 새로운 장면을 맞이한다. 그 장면 속에는 늘 사람들이 있다. 개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느 곳에나 사람은 존재한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중에서 친해지는 사람도 있고, 좁히지 못한 성격 차이로 멀어지는 사람도 있다. 수많은 관계들 속에 단 한 명의 존재가 있다. 우리는 그 사람의 특징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미소 지을 수 있다. 편협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특징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보통 외로울 때,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다. 어떤 모임에서 알게 된 사람이거나, 안부만 주고 받으며 평소 연락하지 않았던 사람이거나, 혹은 이마저도 생각나지 않으면 sns를 찾는다. 그곳에서 여러 사람들의 근황을 보며 부러워한다. sns에서는 대부분 좋았던 일들만 골라 소식을 전하니까.
이들은 주변 사람들에 불과하다. 언젠가 기회가 닿아 인생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우리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내 곁의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의 사소한 변화는 나에게 영향을 준다. 달라진 표정이나 말투, 자세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크거나 작게, 나와 마주하고 있는 소중한 사람이 느끼는 바와 같이.
"엄마 보고 싶다"
나도 모르게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이 말을 들은 여자 친구는 왜 따라 하냐며 어깨를 툭-하고 밀었다. 따라한 게 아닌 나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자주 만나도, 곧 만나게 될 지라도, 지금 보고 있어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 아마도 그들의 존재가 있기에 우리는, 나는 이만큼이나마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부끄러운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할 뿐이다. 마주하고 있는 시간을 소홀하지 않게, 소중하게 받아들여야지 하며. 몇 되지 않는 나의 유일무이한 존재들이 이 순간의 나처럼, 행복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내가 더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야지. 꼭 그렇게 노력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