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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Nov 21. 2015

[11] 퇴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달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아직 퇴사를 염두 하지 않았고 주변 동료들이 시름하고 있을 때. 패여가는 주름 만큼 그들의 고민도 깊었다. 지금의 나, 저물어가는 열정에 기대어 오늘을 힘겹게 보내고 있다. 누가 누굴 걱정했는 지. 한편으론 실 없는 웃음이 나온다.


첫 회사는 사회생활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친다. 대학생 때는 성인이지만 아직 학생이다. 그들에게 있어 '학생'이라는 신분은 위대하다. 대학생이라니, 학생 피라미드의 최상위 계층이 아닌가. 한편으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기도 한다. 학업을 핑계로 피해왔던 진로에 고독과 방황으로 맞서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괜찮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의 제목처럼 이미 이 시기를 거친 사람들이 이해하니까, 또 위로하니까.  


직장인으로서 사회에 첫 발을 딛는 순간부터 우리는 관심의 중심부에서 벗어난다. 현실의 냉혹함 속에 '진로'보다는 '취업'이 목표가 된다. 어떤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 지는 우선순위에서 벗어난다. 유명한 기업에 높은 연봉이라면, 그래도. 그래도. 어차피 내가 하고 싶은 일 따윈 뚜렷하지 않았으니까.


첫 직장은 중요하다. 어설픈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주거나, '넌 역시 안돼'는 식의 패배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리고 직장을 이야기할 때 각 자의 기준을 만드는데, 가진 견해가 좁기 때문에 첫 직장을 직장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만약 이런저런 이유로 퇴사를 한다 해도 경력이 제법 쌓였다면 비슷한 업무를 해야 될 가능성이 높아 더욱 그렇다.


돌이켜보면  첫사랑이었다. 기억이 난다. 입사를 했다는 사실 그 감사함에 불타던 신입의 눈동자로,  흘러내리는 땀은 열정의 증거라는 말을 맹신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실수투성이에 어리둥절한 물음을 해도 용서가 되었고, 때로는 혼이 나도 '이것은 분명 날 위한 조언이야'라고 받아들이던 순수한 나. 생각만으로 진한 잔향이 머문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첫사랑을 하던 나의 모습


언젠가 누군가에게 건네 줄 요량으로 퇴사를 주제로 글을 적은 적이 있다. 떠나가는 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단 한 명에게 건네었던 이 이야기를 함께 공유하면 좋은 것 같아 소개한다.



2년 5개월이라는, 검은 머리가 새치 범벅이 되어 모두 하얗게 변해가는 동안 내 삶의 거칠고 모진 시간들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내 안에 작은 굴곡이 있을 때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 보다는 책이나 영화라는 간접 경험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직면한 어려움에 대해 말을 꺼내 볼 순 있었지만, 어떤 사람을 믿고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해야 되는지를 잘  몰랐을뿐더러 돌이켜보면 말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크다. 어차피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털어 놓지 못한 고민이 더 쌓였을 때 책이나 영화도 더 이상 나를 위한 대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당시에는 어떤 것도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꼭 집어 설명할 수 없다는, 아집이 사실보다 컸던 것 같다.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공통점이 있었다. '너는 틀리지 않았다, 나는 너를 존중한다.'라는 비슷한 유형의 말을 정말 많이 보았다. 이런 기계적인 위로 속에서 내가 겪는 일에 대한 답을 기대했던 나로써는 일련의 배신감을 느꼈다.


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복잡한 나의 일에는 어울리지 않아, 본인들 삶이 아니라 쉽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미안하게도 기계적인 말을 건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어려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이미 마음속에 어느 정도의 결정을 내렸고, '확신'이 생기지 않아 고민이라고 꺼내는 경우였다. 그렇지 않더라도 타인의 조언이 자신의 상황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살아온 환경이나 가치관에 입각했을 때 들은 말이 반대된다고 느껴질 때면 진심으로 다가가기 어렵다.


여태까지 퇴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의 말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을 아직까진 못 봤다. 혹여 받아들였더라도, 그것이 온전히 그 사람의 것이 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경우 가까운 사람이 선택의 갈림길에 있을 때, 내 입장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방향만 함께 고민했다. 모두 동의하겠지만 아무리 가깝고 친해도 내가 그 사람의 인생을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는 없다.


작은 결정에도 선택되지 않은 것들엔 많은 아쉬움이 뒤따른다. 그 아쉬움은 옆에 있는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은 옆에서 지지해줄 순 있지만, 결국 스스로 이겨내야 할 지독한 고독 같은 감정이다.


'염일방일이란 말 들어 본 적 있나요?'


한 가지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한 가지를 포기해야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네 삶은 순간의 선택이 결정한다. 그 선택이 올바른 지 아닌 지는 누구도 아닌, 미래의 나만 알고 있다.


당시 나는 친구들과 '퇴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결정하고, 관리자들에게 보고하는 데 까지 성향에 따라 시간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결론은 같았다. 그들은 대부분 그만두었다. 한 번 고민을 시작한 사람은 퇴사를 생각한 계기가 해결되지 않는 한 끊임없이 반복했다.  


작았던 그 한 가지가 해결되지 않은 채 다른 일들이 더해져서 당사자를 괴롭혔고, 일정 수준에 달하면 이젠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닫곤 했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그냥 그 자체로 싫은 것.


정말 많이 깨달았다. 무엇보다 예방이 중요하고, 사람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초기에 문제를 해결하는 게 핵심이라는 것을 말이다. 한 사람이 퇴사를 입에 담았을 때에는 말을 꺼낸 사람을 회사에 입맛에 맞게 설득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 사람을 통해서 충분히 배워서 남아 있는, 또는 새롭게 들어올 사람들이 비슷한 고충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위에 적은 것처럼, 한 번 퇴사를 염두한 사람은 퇴사를 결심하게 한 계기가 해결되지 않으면 계속 고민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 정도가 암세포처럼 몸 여러 곳에 전이된 상태라면 나아가 조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만약에 전처럼 비슷한 선택의 순간이 온 사람이 있다면, 설득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당신은 지금 있는 그대로도 충분합니다. 또한, 틀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내릴 결정은 단 하루아침의 감정적인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삶은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과거에 발생했던 일이 선택에 큰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시시콜콜한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입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이번 일도 인생에서 숱한 선택과 결정 중 한 가지일 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도 그 결과에 대해 당장 평가하기는 곤란합니다. 내가 확신을 가지고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앞으로 증명하면 됩니다. 아니, 꼭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스스로에게 떳떳하기만 하면 그만 아닐까요. 그리고 이왕이면 선택한 가치가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실은 만만치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언제 쉬웠던 적이 있나요?  도전하고 부딪쳐보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부족하고 어설펐지만 진심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읽으면서 느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현실의 고단함 속에 조금 달라진 것 같다.


그리고 위에 적었던 이야기. 이제는 내가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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