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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Oct 07. 2020

부치지 못할 편지

있잖아, 문득 그때가 생각났어. 기억날까, 너도. 먼저 알려주지 않아도 같은 시간을 떠올렸다면 좋겠는데. 어렵겠지, 물론.


이제는 이사 가서 갈 수 없는 놀이터 벤치가 생각나. 너를 데려다주며 함께 앉았던, 그 벤치에는 우리의 많은 이야기가 남겨져 있는데. 기억할까. 인적은 드물고, 벤치 뒤에 가로등이 있어서 밤이 되면 우리를 비추어 주었는데. 손을 잡고,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그 순간을 살았었는데.


집 근처 맛집에 갔던 시간보다, 노을 지는 기찻길을 걷던 시간보다, 말없이 앉아있던 그 시간이 더 생각나는 건 왜일까. 그리워지네. 연락해보고 싶지만, 오늘은 평일이야. 각 자의 시간을 살아가야 되는 날인 걸.


사는 게 팍팍하고, 다가오는 내일이 그저 불안하니, 소박했던 시간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나 봐. 지하철 통로에서 맞추어 나가는 발에 자아내던 웃음소리, 다리에 화상을 입어 재생 밴드를 붙여줄 때의 눈빛, 손이 차갑다며 양손으로 감싸고 불어주던 입김. 쌓여가는 추억들을 감사하게 여기며 앉아있던 벤치에서의 하루는 이제 어느 날이 되었지만, 여전히 애틋해. 그 시간들이, 나는.


홍제천을 걸어보고 있어. 호흡마저 꺾이게 하는 두근거림이 조금은 나아질까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또다시 일상과 마주해야 될 텐데, 처리해야 될 일들이 쌓인 책상에 앉아 전전긍긍하며 골머리를 앓을 텐데. 차라리 이 길을 따라 그냥 어디론가 걸어가고 싶어. 계속, 계속.


얼마나 더 이겨내야 나는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까. 이제는 그만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해. 이만큼 이겨낸 것도 대단한 거 같아. 20살 때는 혼자 버스도 잘 못 탔는데, 지금은 버스카드가 없어도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그래도 실컷 떠드니 조금 나아진다. 사람은 역시 어려울 때일수록 나누어야 하나 봐. 너에게 닿지는 않겠지만, 네가 볼 거란 생각으로 적다 보니 차분해지네.  


너무 이겨내려고만 했나 봐. 충분히 힘겨운 상황인데. 시간을 조금 내어 머물러보는 게 좋겠어. 내가 불안하다면 불안한 게 맞으니까. 내가 느끼는 불안을 거부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누군가 내 불안을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없다면 나라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거니까.


다시 들어가 볼게, 물론 집으로. 급한 일만 처리하고 쉬어볼까 해. 억지로 붙잡는다고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진 않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분명 다시 걷고 있겠지.


이 밤, 이따금씩 마주 오는 사람들은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아. 잘 보이지도 않고, 관심이 없는 거겠지. 이러한 사람들의 무관심이 나는 좋아. 걸을 때만큼은, 더.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내가 나로서 호흡하며 걷는, 드문 순간이니까.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떤 상황들이 또 나를 꼬집고, 헐뜯고, 괴롭힐까. 그래서인가 봐. 모두가 잠들어가는 이 시간, 밤이 나는 또한 좋아.


말이 너무 길어진 것 같아. 이만 줄일까 해. 나아지진 않더라도 나빠지진 않았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겠지. 헤아릴 수 없이 터져 나오던 고된 상황들에서도 나로 살기 위해 노력했던, 나이니까.


그럼 이만. 평안한 밤이 너에게 찾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랄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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