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소홀했던, 소중한 친구를 위해 꾹꾹 눌러 담은 편지
안녕 친구야. 나를 생각하는 시간에 너에게 편지를 쓰게 된 건, 퇴사 후 소홀했던 우리 사이에 대한 합리화일 수 있어. 이런 내 마음 이해해 줄 거지? 고마워. 너라면, 적어도 너라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것 같았거든.
참 빠르다. 그렇지? 뭐긴 뭐야. 시간이지. 우리가 알게 된지도 꼬박 3년이 되어가. 믿어져? 자의에 의해 흘러온 건지, 타의에 의해 떠내려온 건지 분간은 안되지만. 어쨌든. 돌이켜보면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았던 것 같아. 별도의 탐색전도 갖지 않은 채, 말 한마디 건네면 세 마디가 되어 돌아오고 다시 세 마디를 건네면 다섯 마디로 돌아오는 절친 중에 절친이 되었지. 막연히 평생 함께 할 줄 알았던 너와 나였는데, 이제는 서로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가 되어버렸네.
마음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추억들을 편지에 옮기려고 해서 그런 걸까? 무슨 말을 적어야 지난 3년간 우리 앞에 일어난 일들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애꿎은 천장만 바라보게 되네. 난 제법 선명해. 너와 한껏 즐거웠던 시절들이. 좋은 날인데, 이상하게 갑자기 눈물이 다 나네. 단순히 내 마음 옮겨 적는 것뿐인데. 그래도 너에겐 웃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 지워야지.
'기억나?'라고 적으면 너는 어떤 기억을 먼저 떠올릴까? 나와 같다면 좋을 텐데. 음. 나는 좀처럼 실수하지 않던 네가, 남들이 보면 하나도 티 안 날 것 같은 데 어쩔 줄 몰라하며 얼굴이 복숭아처럼 달아올랐던 게 생각나. 너는? 너는 어떤 기억을 먼저 떠올렸니?
요즘도 빌리어코스티를 좋아해? '한참을 말없이'를 들으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너의 외로운 눈동자가 생각나네. 별 빛 감추어진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 같던, 너의 눈동자. 보고 있노라면 내가 다 '반짝반짝'해지는 느낌이었는데. 음. 갑자기, 네 눈 안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나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야.
그나저나 세상은 왜 이렇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걸까?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하고 싶은 일 하며 여유롭게 지내면 좋을 텐데. 해야 될 일들에 가려서일까. 하고 싶었던 일들이 이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 당장 코 앞에 닥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뭐, 말 다 했지.
아! 내가 너무 감성에 빠져 있었나 봐. 이러려고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건 아닌데. 사실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퇴사를 하고, 조금씩 나를 찾아가면서 대뜸 이런 의문이 들더라. '나는 한참 부족하기만 한데,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나를 좋아해줄까?'하고.
보니까, 물끄러미 바라보니까 나는 제법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이더라. 마음이 떠나 무척 힘들었던, 퇴사 직전 회사 생활을 할 때에도 동료들이 나와 헤어지는 걸 괴로워할까 봐 꽤 피해 다녔던 걸 보면. 하지만 너는 달라. 난 너에겐 쌀 한 톨 만큼의 감정도 숨긴 적 없어. 정 많고 따뜻한 내가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사람. 그게 너야.
완벽하지 않아도 돼, 부족해도 돼, 실수해도 돼, 틀려도 돼. 그래도 넌 나에게 있어 정말 소중한 존재야
그 뻔한 말 있잖아.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한참 부족하기에, 내 삶에도 네가 꼭 필요한 거야. 나는 너의 얼굴도, 키도, 학력도, 능력도 눈여겨본 적 없어. 그냥 네가 좋아. 특히 나를 바라보는 너의 모습.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 너는 꽉 막힌 절정의 겨울을 비집고 내려오는 한 줄기 햇빛이야. 그리고 그 햇빛에선, 미소를 머금게 하는 너의 향기가 나.
요새 많이 힘들어한다고 들었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사람들 틈에서 꽤나 지쳐있다고. 그럴 바엔 차라리 아무도 네 마음 몰라줬으면 좋겠다. 나만, 네 안에서 충분히 머물다 가게. 얼마나 잘난 사람들이길래 너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걸까. 너를 코 앞에 두고. 미련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알겠지? 적어도 나는, 나만큼은 너에게 성공이라는 주관적인 평가를 바란 적 없어. 그냥 네가 더 자주 웃고 건강했으면 좋겠어. 그러면, 그 모습에 나도 함께 행복해질 것 같거든.
와~ 이렇게 길게 쓴 편지는 오랜만이야. 아 맞다 맞다. 꼭 짚고 넘어가야 될 게 있는데, 이건 절대 네가 좋아하는 말들로 쓴 편지가 아니야. 내가 너에게 전하고 싶었던, 순수한 말들 뿐이야. 믿어줘.
막상 쓰고 나니 엄청 부끄럽네. 그런 이유로 이 편지는 우편으로 보내야겠어. 올해 안에는 도착하겠지? 너와 함께 한 2015년. 나에겐 온통 너였어. 알지? 아무렴! 새해 복 많이 받아. 마지막으로, 나의 부족한 부분도 특별하게 만들어줘서 고마워 친구야. 다음에, 아니 곧 보자. 꼭. 빌리어코스티가 흐르는 우리 아지트에서.
"어? 파란불이 깜빡인다." 과거의 너는 말했다. 그 말에 당시의 나는, 너와 함께 있는 순간에 머물다 정신을 차렸다. 네가 곁에 있다는 그 자체로 가득 찬 기분이 들어, 신호등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그깟 신호 따위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니? 그냥, 우리가 걷고 있는 시간이 있음에 감사한 거지.
'너'라는 여운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다음에 건너면 되지. 그런데 있잖아. 우리, 조금 더 천천히 걸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