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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Feb 14. 2021

자유로이 빗속을 걷던, 그날의 나는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던 생애 첫 기억은 여전히 또렷하다. 짝꿍을 정하던 날이었다. 유치원에 다니던 나는 내 의지로 짝꿍이 될 누군가를 선택해야 했다. 남은 친구는 두 명이었다. 한 친구는 당시 내가 마음에 들어하던 아이였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좋아했었다는 마음만큼은 선명하다. 다른 친구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기에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한 친구를 선택하면 남아있던 남자 친구와 선택하지 않은 친구가 자동으로 짝이 되는 상황이었다. 생각했다. 사실,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좋아하는 친구와 짝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 되니까. 하지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그 상황에서 나는 망설였다. 내 입에서 둘 중 한 명의 이름만 나오면 되는데.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는데. 선뜻 말하지 못했다.


먼저, 좋아하는 친구를 생각했다. 만약 그 친구의 이름을 불렀는데 싫어하면 어떡하지 라는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순수한 관심을 거절받는 것만큼 두려운 것도 없었던 걸까. 어린 나는 일찍이 그러한 경험을 했었던 걸까. 친구의 이름을 불렀을 때, 굳어가는 친구의 얼굴을 상상했다. 두 번째는 선생님을 포함한 친구들의 시선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이 또한 대답과 질문을 끊임없이 만들었다. 마음에 있는 친구와 짝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상상했기 때문이다. 결국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친구를 가리킴으로써 그날의 기억은 끝이 난다.


돌이켜보면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나 타인을 의식하는 모습은 오래전부터 나를 괴롭혀왔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부족할, 7살이라는 나이를 살아가면서도 나는 살피고 주저했다. 자연스레 표현까지 이르기보다는 생각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친구들에게는 '무난한 아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무엇을 해도, 먹어도, 어디를 가도 괜찮은 아이로써 친구들에게 불렸을 테니까. 원하는 대답은 늘 있었다. 때로는 뚜렷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절받는 상황을 포함하여 내가 꺼낸 말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을 미리 생각하는데 익숙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언제나 "그래" 아니면 "좋아"였다.


하루는 "그래"라고 대답하며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신밧드 2000>이라는 영화를 보기 위해 버스를 타고 극장으로 이동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아빠는 내가 동네 밖을 벗어나는 일에 대해 걱정하는 편이었다. 어떤 친구들이랑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꼼꼼하게 확인한 이후에 친구들과 만나는 걸 허락해주었다. 기억한다. 친구들과 어울린다거나 영화를 본다는 기대감은 적었다. 조심해야 된다는 말을 강조하는 아빠의 모습으로 말미암아 무척 긴장했으니까. 친구들과 만나면서도, 버스를 타면서도, 영화를 보면서도 나는 그 상황에 집중하기보다는 길을 잃을까 봐 걱정했다. 친구들과 약속 장소에서 못 만나거나, 버스를 잘못 타서 극장에 못 내리거나, 영화가 끝나고 집에 갈 때 잘못된 길로 갈까 봐 겁이 났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앞으로 나왔다.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땅을 뚫을 것처럼 매섭게 쏟아졌다. 우산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냥 지켜보던 우리들은 버스정류장으로 앞다투어 달려갔다. 빗줄기가 약해지거나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이내 다가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하지만, 나는 버스에 타지 않았다. 무슨 배짱이었을까. 어디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길을 잃을까 봐 걱정했으면서. 집으로 향하는, 친구들을 태운 버스가 출발하고 빗속에서의 걸음이 시작되었다.


극장은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게 분명하다. 멀다고 느꼈다면 분명 걷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익숙한 지명, 그러니까 홍제역이라든지 홍은동이라는 안내판 속의 지명을 따라 걸었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장대비가 온몸을 적시고, 흠뻑 젖은 옷은 움직임을 더디게 했고, 낯선 길인 탓에 두렵기도 했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언덕을 넘고, 두려워하고, 달리기도 하며 집으로 나아갔다. 길을 따라가다 집이 나올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이 그저 즐거웠다.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도전하는 것만 같았으니까. 누구도, 그 어떤 사람도 의식하지 않고 나의 선택에 의지하여 다가가는 집은 여느 귀갓길보다 두근거렸다. 조바심에 걸음이 빨라지기도 하고, 지친 까닭에 걸음이 느려지기도 하며 걷고, 또 걸었다.


포방터시장이라는, 익숙한 곳에 다다르자 약속이라도 한 듯 비가 그쳤다. 억세 보이던 하늘에는 해님이 어느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따스한 기운이 감돌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온 세상의 비를 혼자 맞은 것 같은 모습 때문에 이따금씩 사람들이 쳐다보았지만 개이치 않았다.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 가 보는 극장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집까지 무사히 걸어가는 내가 자랑스러웠으니까. 지금의 내가 그 당시의 나를 본다면 우스꽝스러울 것 같다. 통통한 체격의 초등학생이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모습으로 동네를 걸어 다니는데, 걸음걸이를 보면 그보다 당당할 수 없으니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해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순간보다 자연스러웠다.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내면은 평온했다. 집으로 다가갈수록 이불속에 어서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내딛는 걸음들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었던, 어린 나는 우연한 계기로 시작했던 집으로의 여정이 뿌듯했다. 비록 엄마에게는 버스 타기 전에 맞은 비라고 설명했지만, 엄마가  말을 믿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삶은 밤을 먹던 모습까지 기억하고 있다. 이는 선택의 기로에서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당당하게 걸어갔던 첫 기억으로 나에게 남아있다.


어른이 된 나는 그 시절의 나를 대신해서 말할 수 있다. 여행이었다. 여행의 순간이 즉흥적으로 찾아왔던 날이다. 여행에는, 특히 계획 없이 떠난 여행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야말로 여행의 진실한 맛이라고 생각한다. 즉시적으로 다가오는 다양한 선택의 순간에서 나에게 의지해 내리는 결정에 우리는 박수를 치기도 하고, 고개를 떨구기도 한다. 그러나 박수를 치거나 고개를 떨구는 행동은 결정 이후에 나타나는 결과를 통해 우리가 선택하는 행동이다. 선택하지 않는다는 보기는 여행에서는 없으므로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의 순간에서 오롯이 나로 인한 선택은 결과마저 수용되도록 한다. 위험한 상황에서의 선택이 아닌 이상, 어쩌면 결과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그날의 내가 아빠에게 혼이 났는지, 감기에 걸렸는지 하는 장면은 전혀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나에 의해, 처음으로 떠났던 여행은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나의 마음속에 이정표가 되어 선명히 남아있다. 그날도 오늘 같은 일요일이었는데. 어디론다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시간이다.   


Image by Mar Dai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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