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로 인해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입사한지 2년이 다 되어가던 즈음이라고 기억하는 걸 보니, 아마 2015년 1월 정도의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회사에서는 1년 차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지난 한 해에 대한 평가, 새해 목표와 함께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주제로 발표하는 시간을 계획했다.
주제 선정으로 인해 한참을 갈팡질팡 하고 있을 때, 첫 발표를 시작하는 날이 되었다. 그리고 시작한 날로부터 꽤 여러 밤이 지났다. 지난 한 해 평가와 새해 목표는 대부분 비슷한 흐름이었는데, 요리할 때의 팁이나 운전 잘하는 방법 등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는 다양한 주제들이 나왔다. 뒤쪽이었던 나의 차례는 다가오는데, 발표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점차 고갈되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번뜩!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좋지만, 동료들이 나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를 주제로 정하면 어떨까? 이 생각을 바탕으로 선배, 동기, 후배를 포함한 18명의 동료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당시의 나에 대해 얼마큼 이해하고 있는지와 함께 나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말수가 적었던 나에 대해 동료들은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비교적 쉬운(?) 5지선다형 문제 7개를 냈는데, 신기한 결과가 나왔다. 내가 마음속으로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많이 맞추는가 하면,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꽤 많이 틀렸다.
객관식 문제 아래에는 설문의 목적이었던, 나의 발표를 통해 듣고 싶은 주제를 묻는 항목을 넣었다. 연애 오래 하는 법, 대화하는 법 등 다양한 의견을 적어주었는데 그중 가장 많이 겹치는 주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화내지 않은 방법이다.
오잉? 단 한 번도 고려해 본 적 없는 주제라 당황했다. '내가 회사에서 화를 낸 적이 없었나?'생각해보았는데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분명 화가 난 적은 있었는데, 나는 왜 화를 내지 않았을까. 되려 나도 궁금했다.
발표를 준비하며 약 2년의 가까운 나의 회사생활을 돌아보았다. 특히 내가 화를 내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고, 나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당시 발표했던 내용을 아래에 소개한다.
화가 났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해야 합니다. 쌓아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화가 나지 않으면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화를 품게 되었나요? 그 화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나요? 즉각적으로 내뱉기 전에 꼭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저는 '같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편입니다. 확신이 없어 보이겠지만, 제가 틀릴 수도 있을 약간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화에 대해 이야기할 땐 평소보다 확고해진 듯합니다.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화를 표현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화'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성향에 따라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겠지요. 저는 화가 없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저 또한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볼 때 종종 화가 납니다. 자신의 생각이 소중한 것은 알고, 타인의 생각은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할 때 '욱'하는 감정이 정수리를 향해 큰 기지개를 켭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을 때에도 제가 순간적으로 참을 수 있는 이유는 화를 냈을 때 느끼는 시원함보다, 나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절정에 달했던 화를 토해낸 후에 후회한다고 해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화를 낸 사람 스스로는 잘 기억 못할 수 있지만, 화에 상처받은 사람은 그날 있었던 모든 일들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핏발 서린 눈동자까지도.
순간의 화를 참고, 시간의 여유를 갖고 돌아보면 사실 별 것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 화가 나는 일이라면,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을 때의 상황을 면하고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표현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하고자 했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무조건 참으라는 건 아닙니다. 화가 극에 달한, 통제할 수 없는 화를 피하라는 뜻입니다.
만약 사람으로 인해 화가 나셨나요? 그렇다면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나요? 모두가 동의하는 그 사람의 큰 잘못인가요? 생각해봅시다. 만약, 상대방을 나의 관점으로 보고 이해하려 한다면 이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나와 다른 환경에서 자라 온 상대방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해서 저에게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상대방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나의 관점으로 인정하기입니다.
나는 나의 관점에서, 상대방은 상대방의 관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지금의 관점을 갖기까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들은 말이나 표정, 행동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이라는 큰 범주로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같지만, 고유한 개인으로서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재 당신은 진심을 다한, 애정 어린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또 생각하고 계신가요? 사랑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단연코 없습니다.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 이외의 것들. 특히 상대방에게 먼저 관심을 가져보세요. 어떻게 자라 왔으며, 꿈은 무엇이고, 취미나 특기는 무엇인지 등등. 내가 했던 질문들에 주관적인 나의 생각을 개입시키지 말고, 상대방이 하는 진솔한 대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보세요.나와는 다른 그 사람이 온전하게 보일 때까지.
그렇다고, 나의 관점을 없애고 상대방에 맞추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나와 상대방 사이의 불균형에서 오는, 또 다른 종류의 화를 재촉할 게 분명합니다. 음- 한 마디로 정리해봅시다. 내가 소중한 만큼, 상대방도 소중하다. 화가 날 때, 그 화를 순간적으로 참지 못할 것 같을 때 반드시 떠올려봅시다.
결론입니다. 저는 화를 잘 내지도 않지만, 잘 나지도 않습니다. 혹시, 제가 사람들에게 화가 잘 나지 않는 이유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아끼고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 덕분은 아닐까요?
'인생수업'이라는 책에서는 화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화를 내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며 알맞은 시간과 장소에서 적절하게 표현할 때는 매우 쓸모가 있습니다. 억압된 화는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채로 마음속에 남습니다. 신체의 중요한 경고 체계 중 하나인 화의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억눌러서는 안됩니다. 화는 경험해야 할 감정일 뿐 판단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다른 감정들처럼 화내는 것 역시 의사소통의 한 형태이며, 상대방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책의 내용처럼 화라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감정의 한 가지 형태이다. 화가 난다는 게 잘못되거나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한 번 생각해보자. 정녕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이 나의 화를 감당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지.
화를 내려던 여러분! 눈에 힘을 풀고, 호흡을 가다듬어주세요. 당신의 화로 인해 오늘도 한 명의 소중한 사람이 상처받고 있답니다. 알겠죠?
잊지 마세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