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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Oct 31. 2021

지나간 상처들이 마음으로 다가오는 밤,

  내가 겪은 바다 중에 가장 생생하게 기억 남는 곳은 월정리 해변이다. 바다를 가까이에서, 오래 본 것이 그때가 처음이기도 했다. 재작년 봄이었다. 당시에 나는 두 번째 직장에서 퇴사하고 상담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부분의 일들이 계획대로 되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 늦잠도 자고, 조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도서관에 남아 공부하기도 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으니까. 


  하지만 마음에서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른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래도 되나?' 싶은 게 그 이유였다. 주변 친구들은 직장에서 자리를 잡거나, 집을 사거나, 돈을 모으고 있는데. 나는 직장도 그만두고, 집은 커녕 돈을 까먹는 대학원생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 길이 맞을까?' 하며 나아가려는 발길을 서성거리게 만들었다. 


  제주로 떠난 것은 '이러다 큰일이 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밤이 찾아올 때마다 내일이 다가오는 게 겁이 났고, 차라리 감은 두 눈이 더 이상 떠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삶은 이어졌고, 고심 끝에 '어디든 가보자'라는 단순한 계획으로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람은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삶의 의욕이 적은 시기에 다가오는 버스를 보며 황급히 피하던 나의 행동을 보며 깨달았다.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반사적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혼자 여행을 다녀본 적도 없던,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불안해하던, 중간고사 시험을 앞두었던 내가 제주도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살고자 하는 거센 투쟁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제주에서의 둘째 날 밤, 월정리 해변에 도착했다. 내일이면 서울로 올라가야 했지만, 두렵지 않았다. 바닷가에서 머물던 그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연히 걸터앉은 돌계단에서 일 분, 십 분,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을 잊은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바다에서 나는 우거진 숲을 보았다. 가시덩굴로 가득한 숲을, 한참을 망설인 끝에 조심스러운 손길과 걸음으로 나아갔다. 


  저벅. 저벅. 얼마나 걸었을까. 동굴을 보았다. 어두움이 문을 대신하던 그 동굴은 상담을 배우며 알아갔던 나의 상처들이었다. 스스로 알아주지 않았던 상처들이 쌓이다 못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구멍을 파고 그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꺼비집처럼 작았던 구멍은 상처의 크기와 양에 따라 커져갔고, 그러한 상처들은 감추지 않으면 삶을 이어나갈 수 없을 정도로 늘어갔다. 


  나는 오늘, 동굴 앞을 다시 서성인다. 불안하다. 두렵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불안함과 두려움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나는 익숙한 손길로 가시덩굴을 헤친다. 훤히 드러난 동굴을 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본다. 동굴의 크기는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또다시 상처가 이만큼이나 쌓였구나'. 


  나의 두 눈은 달빛이 되어 동굴 내부를 비춘다. 바라보고, 바라보다, 이내 깨닫는다. 그날, 그 밤 월정리 해변에서 보았던 것은 진실한 나의 마음이었구나. 오늘, 무기력한 나의 일상에 월정리 해변이 찾아온 것은 스스로를 돌볼 때가 되었다는 마음의 신호이구나.




멀어져 가는 하루

물 한 모금 마시고

부은 눈 비비며

햇살 보고

그림자도 보고

까마귀 울음소리

문틈에 서성이면


모래알 널게 깔린

돌계단에 쪼그리며

파도를 그리워하던

짙은 밤 그곳으로


내쉬는 숨으로

흔들리는 턱끝은

살아보라고, 살아보라고

바닷가를 떠도는

굽은 등 감싸고


콧잔등 문지르는

바다의 울음소리

월정리 해변으로

데려가려는데


Image by klickblick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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