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없다, 너만 없다

버거웠던 하루를 보낸 후에 남아있던 감정들

by 두근거림

독백 가득한 밤. 적막한 하늘엔 나를 마중 나온 보름달이 웃는다. 어찌나 환하게 웃던지. 하루 종일 품었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보는 내내 두려운 감정이 들었다.


속이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나에게 속삭이긴 더욱 싫었다. 전하지 못한, 숨기고 있는 말들이 너무 많아서일까. 부쩍 음흉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맞아. 나는 요즘 겉과 속이 무척 달라' 어설프기만 한 나의 미소에도 사람들은 '즐거워 보이네요'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건넨다. '어?아닌데. 나는 그렇지 못한데'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이 맞다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보이든 그냥 모른 척해줬으면 좋겠다. 뭐, 어차피 솔직한 나의 이야기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을 테니까.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뜬구름 잡듯 멋대로 해석할 게 뻔하니까.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일이 해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침묵을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 '오해'라는 말은, 어쩌면 평생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일 수도.


오늘,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나에겐 큰 버거움이었다. 단지, 형식적인 말을 하고 싶지 않았고, 대답하고 싶지 않은 말들 뿐이었는데. 상황은 나에게 반응을 강요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오늘의 나는 평소완 조금 달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원래 그런 사람쯤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얼마 되지도 않는, 그 짧은 시간을 비집고 '오해'가 쌓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나도 참 못났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해야 하는데. 유독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고요함에 파묻혀 그냥 멍하니 있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일까? 나의 침묵을 이해해주지 않는 그들이 야속했다.


정해진 규정에 따르면, 나는 늘 웃어야 한다. 생각은 짧게, 행동은 힘 있게. 적절한 리액션도 해야 한다. 상대방이 말을 할 때는 눈을 또렷이 쳐다보고 '잘 듣고 있어요'라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 만약, 나만의 생각에 잠기게 되면 이는 명백한 규정 위반이므로 안된다. 절대 안된다.


공기도 나에게 규정을 언급하려는 걸까. 갑자기 숨이 턱턱 막힌다. 책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처럼, 내가 행복해지는 게 인생의 정답이라면 당장 숨어버리고 싶다. 멀리 도망치고 싶다. 모두의 기대를 등한시한 채, 더도 말고 내 몸 하나 뉘일 수 있는 공간에 자연과 맞닿을 수 곳이라면 그 어디든.


하루 종일 나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누구나 좋아할법한 대중적인 표정을 하고, 부족한 나를 포장하기에 바빴다. 부실하게 짝이없는 포장지로 다급하게 감추었던 나의 감정들. 과연 오늘의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아침엔 모처럼 눈이 내렸다.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손을 뻗어 체온으로 눈을 녹여보았다. 어째 '차갑다'는 느낌보다, '사라진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고 보면 눈에겐 묘한 매력이 있다. 자기 마음대로 찾아와선 온통 흔들어놓고, 어떤 기별도 없이 사라진다. 다가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멋대로 찾아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너처럼.


나는 오늘 네가 필요했다. 그 누구도 아닌 네가 무척 보고 싶었다. 너라면, 너라면 아무 말도 잇지 못하는 나를 꼬옥 안아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등을 토닥여주며 내가 좋아하던 그 말을 들려 주었겠지.


"괜찮아, 괜찮아"


우리가 함께 띄웠던 달콤한 이야기들은 소복이 쌓여있는데. 멈칫, 돌아선 순간. 너는 없다. 너만 없다.


설익은 봄. 하얗게 서린 안암동 거리엔 눈이 내렸다. 하지만 눈을 닮은 넌, 더이상 내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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