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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Mar 26. 2022

나는 기억과 추억 그 어딘가를 힘차게 걷고 있다

나는 홍지동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곳의 직원이 되기까지 인턴으로서 1년 7개월 동안 공부하고, 체험했다. 어느덧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 곳으로 출, 퇴근을 하다 보니 직장에서의 경험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출근길에 타는 만원 버스, 점심시간에 먹는 편의점 김밥, 부리나케 작성하는 결재 서류, 세상이 어둑해져야 비로소 맡게 되는 바깥공기처럼 나의 일상은 의식 없이 내어지는 숨처럼 흐르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새로운 자극은 삶에 활력을 더한다. 제자리를 반복해서 돌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자신에게 필요하거나 원하는 일을 깨닫도록 돕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자극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새로이 시도한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퇴근 이후라 할지라도 새로운 일을 찾아서 하기에는 체력적인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선하고도 두근거리는 자극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생각의 전환에 불과하다면 기꺼이 시도해볼 만한 용기가 생길 것이다. 


요즘 대학가에서는 코로나19의 영향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실인 가게가 날마다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장소에는 필연적으로 사람의 기억이 머문다. 저마다의 특별한 경험이 한 장소에 다양하게 남으며, 그 장소를 지날 때면 아프면서도 달콤하고 쓰라리면서도 값진 기억이 마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장소가 다르게 바뀌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새로운 가게가 들어서고, 그 가게가 눈에 익어갈 즈음이면 이전 가게에 남아 있던 기억의 흔적은 서서히 사라져 간다.  


나에게는 유독 알록달록한 색으로 기억되는 장소가 있다. 20살 때부터 봉사활동을 했던 복지관이 바로 그곳이다. 어린이날 행사를 보조하는 활동이 있다며 같이 가보자는 친구의 제안으로 처음 인연을 맺은 그곳은 나에게 체험학습장에 가까웠다. 봉사활동을 통해 누군가를 돕는다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으면서도, 그러한 활동에 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는 복지사 선생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서 4년간 봉사활동을 하며 많은 복지사 선생님, 이용인, 자원봉사자들을 만났다.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기껏해야 반 친구들 몇몇과 가끔 어울리는 소심한 아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경험을 하며 사람을 사귀는 방법에 대해 서서히 배워나갈 수 있었다.


봉사를 했던 기간만큼 다양한 활동을 경험했다. 미취학 아동의 학교 적응을 돕는 활동에서부터 김장봉사, 청소년 진로탐색 프로그램, 태안 앞바다 기름때 제거처럼 그 종류도 여러 가지이다. 그중에서도 단순 봉사를 했던 날이 요즘 들어 자주 생각난다. 하루는 당시 근무하던 팀장님이 황화일 겉면에 붙일 글자를 오려달라고 부탁했다. 누군가에게는 간단하고 쉬운 부탁일 수 있지만, 지금의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당시 나에게는 아니었다. 나는 손으로 하는 일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오리거나, 자르거나, 만들거나 하는 일을 해야 할 때면 지레 겁부터 먹었다. 20살이 되도록 많이 해 보지 않은 일이었고, 그러한 일을 하며 내가 얼마나 미숙한 사람이었는지 밝혀질까 봐 두려웠다. 그날 팀장님의 부탁을 듣는 순간에도 '오리는 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서투르고 부족한 애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화일과 A4용지, 가위, 박스테이프를 자원봉사자 책상에 올려두고 한참을 가만히 쳐다보던 일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러다가 나는 팀장님께 다가가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러자 팀장님은 "잘 못해도 괜찮으니까, 천천히 해봐.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야"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자리에 앉아 가위질을 시작했다. A4용지 몇 장을 오리고 황화일에 붙이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현재의 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뎠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핑킹가위로 오린 듯, 제각각의 모양을 한 글자들이 황화일 곳곳에 붙었다. 삐뚤빼뚤하게 붙은 테이프는 덤이었다. 나는 내가 만든 황화일을 보며 팀장님이 나에게 실망하거나 화를 낼 것이라 예상했다. 그때 나에게는 '왜 팀장님이 나에게 실망하거나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할까?'라고 되물을 힘은 없었다. 내 생각이 곧 사실이 될 거라는 두려움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일을 건네받은 팀장님은 예상과는 다른 말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잘했네. 거봐, 너도 할 수 있잖아". 분명, 잘 만들지 못했다. 그날 만든 황화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손에 땀이 세어 나온다. 최소 1년 동안 그 황화일을 썼을 텐데, 어린아이가 만든 것 같은 순진무구한 모습이 뭐가 괜찮았을까. 하지만 나에게 그러한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마음이 온몸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은동이 나의 고향이라면, 복지관이 위치한 삼성동이야말로 제2의 고향이다. 점심시간마다 자주 갔던 미림 분식,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오갔던 원신초등학교, 출출할 때면 들렀던 까치 분식처럼 삼성동을 생각하면 그곳과 연관된 많은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 신경을 많이 쓰던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조는 날도 많았고, 관계에서 사소한 오해가 생겨 마음 졸이는 일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들이 쌓여 오늘의 내가 비교적 나에 가깝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자산이 되어주었다. 나이가 더 들어서 했다면 수습하기 어려웠을, 서투르고 무모했던 관계 경험은 내가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지키면서도 적절히 표현하는 요령을 터득하는 밑거름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10년 만에 복지관에 다시 들렀다. 근처에 방문할 기회가 우연히 생겼고, 같이 봉사하던 친구가 직원이 되어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복지관 내부는 많이 변해 있었다. 예전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친구와는 잠시 대화를 나눈 뒤에 빠져나와 삼성동을 혼자 둘러보았다. 그곳을 걷던 나는 10년 전 즈음의 나와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을 한창 걸을 때만 해도 나는 그 길이 참 뜨겁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밋밋하고 평범한 길에 불과하다니 신기했다. 하지만 걸을수록 풀어지는 추억의 보따리는 나를 계속 걷게 했다. 가고자 하는 곳은 없어도 끊임없이 걷던, 그날의 나는 분명 행복했다.  

     

문득, 퇴근하는 길을 둘러보았다. 회사가 위치한 홍지동에는 기억이 묻은 가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김밥천국과 비슷한 느낌의 윤가네는 나의 최애 식당이다. Yoon's House라고도 부르는데, 나는 그곳의 치즈알밥과 돈가스를 특히 좋아한다. 가끔 돈가스를 본격적으로 먹고 싶을 때면 함께식탁이라는 곳을 찾는다. 그곳에 갈 때면 나는 오직 한 가지 메뉴, 돈가스 카레를 주문한다. 어댕맛댕이라는 제육덮밥을 주로 먹던 식당도 있었는데, 그곳은 아쉽게도 최근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외에도 버스를 타러 내려가는 길 주변에 있는 햄버거 가게, 카페, 인쇄실, 떡볶이 가게는 모두 나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 가게들이다. 인턴을 시작할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억들이 여러 가게에 저마다 보관되어 있다. 피곤에 찌든 얼굴로 지나갈 때는 보이지 않던 홍지동에서의 2년이, 삼성동을 회상하던 나의 눈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퇴근을 할 때면 특히 나도 모르게 '지겹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정신없이 일하다가 녹초가 되어 퇴근하는 모습이 매일 반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이 고되고 재미없기만 한 건 분명 아니다. 가끔은 맛있는 음식을 시켜 동료들과 나눠 먹기도 하고, 주변 가게에 가서 서로의 푸념을 나누며 위로하기도 하고, 센터를 이용하려 하거나, 하고 있는 학생들과 교류하며 소소한 보람도 느끼고 있다. 돌아보면,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일들이 나의 일상 곳곳에 숨어져 있었다. 


우리의 인생은 곡선과 같아서 좋은 일이 있으면, 안 좋은 일도 따르기 마련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일이든 삶의 한 과정으로서 이해하고, 그 시절을 충분히 경험해 보며 살아가려는 자세가 아닐까. 만약,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에 그 일에 과도하게 몰두했다면 나는 4년이란 기간 동안 봉사활동을 하지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나와 희로애락을 나누며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과의 기억이 담긴 공간들이 즐비해 있었기에, 그곳을 걷고, 머물고, 회상하고, 추억하며 안 좋은 일 끝에 다가올 좋은 일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가파른 언덕으로 유명한 홍지동 길을 내려가는 나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띄어져 있다. 요즘 겪는 고난 또한 언젠가는 아린 추억이 될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기왕 지나간 추억이 될 거라면 이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마저 든다. 걸음이 더해질 때마다 홍지동에서 함께 했던 소중한 사람들이 봄의 새싹처럼 곳곳에서 움트는, 나는 기억과 추억 그 어딘가를 힘차게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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