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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Jun 05. 2022

낯선 길 위에서 나는 자유로움을 경험한다

한 달 전 즈음, 주말을 이용하여 외부 교육을 들으러 간 적이 있다. 회사에 퇴사자가 생겼고, 그가 하던 일을 무리 없이 진행하기 위해서는 꼭 들어야 하는 교육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꽉 채워 진행하는 일정이었기에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회사는 생각하는 순수한(?) 마음을 앞세워 자발적으로 신청했다. 


교육장에 가는 일부터, 교육을 듣는 일 자체가 나에게는 곤욕이었다. 그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게 있고, 없고를 떠나 주말까지 일의 연장선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만약, 나의 개인적인 흥미로 신청한 교육이라면, 물론 그렇다면 그 교육을 그 시점에 신청하지는 않았겠지만, 대충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로서 수강한다는 마음가짐 때문인지 한 글자라도 소홀히 넘기면 안 될 것 같은 부담감이 따랐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어렵게 만든 것은 그곳의 분위기였다. 낯선 사람들이 그득히 모여 앉은, 서로 자기소개도 하지 않은 채 강사가 설명하는 내용을 가만히 듣고 있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게 느껴졌다. 책상과 책상 사이의 거리는 가까웠지만, 주변 사람들의 이름도, 직업도,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했던 나는 그곳이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회사보다도 더 긴장되었다. 


일요일이었다. 토요일 교육을 듣고, 어떤 분위기에서 교육이 진행될지 아는 상태에서 가는 건, 다소 과장이 따르지만 군생활을 조금 경험한 이등병이 신병 위로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는 기분과 유사했다. 오전 교육을 '멍'한 상태로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어제와 같은 쌀국수를 선택했다. 물론 맛이 있기도 했지만, 피곤한 탓에 무엇을 먹을지 선택하는 일조차 귀찮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나니 오후 교육까지는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걷는 걸 무척 좋아한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나를 '걷기 신봉자'라고 소개하면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만큼 나는 걷는 시간을 애정 한다. 특히, 낯선 길을 걷는 걸 좋아한다. '자극'은 반복될수록 익숙해지는 것이 당연하기에 나는 내면에 잠들어있는 모험심을 확인하는, 그런 시간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때로는 익숙한 길을 걸으며 평안함을 느끼지만, 기본적으로는 골목 하나만 더 지나면 무엇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길을 선호한다. 이러한 여정이 나에게 긴장과 스트레스를 주기도 하지만, 내가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생한 체험을 선물한다. 날 것에 가까운 생생함은 일상의 틀 속에 갇혀 있던 나를 깨우고, 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나를, 틀 밖에서 나와 세상의 관계를 관찰하도록 돕는다. 


나는 이날도 어김없이 길을 걸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무심한 표정들, 양손 가득 장을 본 채로 어딘가로 걷는 아주머니의 발걸음, 근심에 빠진 듯 땅을 보며 걷는 아저씨의 등, 이따금씩 들려오는 화사한 웃음소리는 잠들어있던 내면의 나를 깨웠다. 지쳐있었다. 회사에서는 사람들이 계속 그만두고, 나는 계속 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부서의 사정은 나빠지기만 하고. 나의 직급보다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 나날 속에서 나는 나를 돌보아야 할 여유도, 그러한 생각도 갖지 못했다. 나는 하루를 살아내기에 바빴고, 내 마음을 돌보는 일 따위는 중요치 않다고 여겼다. 해야 하는 일이 코앞까지 밀려왔기 때문이다. 이 일을 당장 해내지 못하면 나의 책임으로 돌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을 보내던 나의 마음에는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저녁 있는 삶을 기대했다. 주말이 보장된 삶을 꿈꿨다. 삶이 여유롭기를 바라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회사가 나에게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고, 따르기 바빴다. 이처럼 내가 바라고, 원하는 가치가 좌절되는 경험은 반복되었고, 나는 어느새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에게 들이밀며 '나다운 삶'을 포기할 것을 스스로에게 강요했다. 잔잔하게 흐르는 듯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힘차게 흐르는 여느 강물처럼, 내 마음에는 좌절된 욕구와 그로 인한 분노가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30분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잠들어있던 분노와 마주했다. 바라보았다. 아침에 나누던 사소한 대화가 일에 지장을 미칠까 봐 동료의 눈을 피한 일, 점심을 먹으러 나갈 기운도, 의욕도 없어서 삼각김밥을 사 먹던 일,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던 친구의 연락을 외면한 일. 이러한 장면들이 모두 나를 위하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 시간들을 누리지 못하고 애써 피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자유를 갈망했다. 완전한 자유, 그러니까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고 나의 의지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삶이 내 앞에 기적처럼 펼쳐지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걸음에 걸음을 더하며 나는 내가 꿈꾸던 자유가 '잘못된 자유'임을 깨달았다. 우리네 삶은 관계와 같은 환경으로 뒤덮여있기 때문에 한 개인의 의지대로만 살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견고하게 둘러싼 것 같은 환경과 '나'의 사이에서 자신의 의지를 얼마나 발휘하는가 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자유의 정의를 다시 내려보았다.


자유란, 통제나 억제된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 책임과 몫을 이해하고 기꺼이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자유의 의미를 새롭게 정리하며 나는 나 자신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회사의 일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내 삶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나는 그동안 업무를 하며 경험한 좌절감을 이해하며, 좌절감을 계속 겪도록 스스로를 가만히 방치하는 것은 나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의지에 반하는 회사의 요구나 지시에는 충분히 분노할 것이며, 그 분노가 외부로 향하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느낄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분노를 스스로 감내하기보다는 사람들과 나눌 것이다. 그들과 나누며 내가 회사의 부품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따뜻하게 확인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상사에게 부당함을 토로할 것이며, 그 결론으로 회사의 일부로서 헌신할 것을 강요받는다면 나는 기꺼이 회사를 포기할 것이다. 


또한, 걸을 것이다. 주말까지 교육을 들어야 하는, 자유가 통제되고 억제된 상황에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로움을 경험했다. 삶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스트레스와 멀어질 수 없고, 자극의 연속이라면 그 안에서 자기만의 자유를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 걸음의 끝에 기다리는 것이 졸음 일지는 모르겠으나, 한낮의 거리를 걸으며 나는 나에게 주어진 자유와 그것을 가꾸고 지키기 위한 책임과 몫을 소홀히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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