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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Jun 01. 2022

내가 기다리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을 끌어안고 살았다. '순간'을 경험하며 살아 본 기억은 전무하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다만 나를 전복시킬까 봐, 세상에 모두 알려질까 봐 두려워했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감정은 불안이다. 나이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주 어린 시절이었는데 잠에서 깨어나니 집에 아무도 없었다.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미세한 빛이 내가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말해주었다. 나는 격정적으로 울었고, 이내 돌아온 엄마와 만난 뒤에야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그로부터 나는 수시로 불안과 공포가 빚어내는 생각들에 수시로 가슴을 졸였다. 장을 보러 간 엄마가 늦게 돌아오는 일이 생기면, 누나가 늦은 시간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며 일과를 포기해야 할 만큼의 생각 덩어리를 품고 어쩔 줄 몰라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사람과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학교, 학원, 직장, 모임에서처럼 누군가와 만나는 일은 나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내가 한 말을 오해하지는 않았을까?', '내 행동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까?', '나와 있는 시간이 재미없게 느껴지면 어떡하지?'처럼 진실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라면 '나'를 드러내는 모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큰 대상일수록 모나지 않은, 적절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렇기에 나는 관계에 있어서 더욱 조심성 많은 사람이 되었다. 사람에 따라 적절히 반응하면서, 그러니까 그들이 기대한다고 생각했던 반응을 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들이 주는 사랑을 받길 원했다. 하지만 나의 조심스러움이 커질수록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과 연관되어 있는 활동이나 소속이 사라지면 나 또한 그들의 기억에서 사리지는 듯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조심할수록 나는 혼자가 되었다. 나에게 있어 관계에서의 조심스러움은 '나'를 드러내지 않음이며, 좋아하는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음과 같다. 즉, 내가 좋아했던 누군가는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가능성이 적고, 좋아하는 마음이나 내면의 이야기들을 기꺼이 표현하지 못했던 내 삶은 대부분이 공허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공허함을 체험하고 있다. 펜을 당당히 내려놓고 누군가에게 연락하고 싶은, 기왕이면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하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그가 내 옆에 나란히 앉아 주었으면 하는, 함께 자연을 바라보고 싶은, 허전함이 느껴지는 내 몸을 힘껏 안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일상의 과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여 누군가와 만나면 좋겠지만, 나는 여전히 조심스럽고, '너'에게 받을 거절을 두려워하기에 교감하고 싶은 마음을 삭히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삭히려 들수록 이제는 내면에서 거센 반발이 일어난다. 호흡이 가빠온다. 일에 도통 집중하기 어렵고, 그저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이 몸을 지배한다. 


문득, 최근에 읽은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데이비드 호킨스(David R. Hawkins)가 쓴 <놓아버림>에 보면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


생각이란 감정이 생긴 까닭을 설명하려는 마음의 합리화에 불과하다. 감정이 생기는 진짜 원인은 감정 이면에 쌓여 있는 압력이 밀어붙여 특정 시점에 올라오게 하는 데 있다. 생각이나 마음 밖 사건은 마음이 지어내는 변명일 뿐, 감정의 원인이 아니다. … 우리는 계속 놓아버림으로써 이러한 자유 상태에 머물 수 있다. 감정은 오고 가지만 나의 감정이 곧 나는 아니며 진짜 '나'는 감정을 지켜볼 뿐임을 깨닫기에 이른다. 더 이상 자신을 감정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호킨스(David R. Hawkins)(2013). 놓아버림(pp. 45-47). 판미동.


위의 내용을 정리하며 마음이 뜨거워지는 걸 느낀다. 내가 느꼈던 관계에서의 불안은 주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내면에 거대하게 자리 잡았고, '조심성'이라는 형태로 세상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 당시에, 아니 여전히 느끼고 있는 이 불안이 사랑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 '나' 자체가 아니라고 여기니 호흡이 점차 제자리로 돌이오며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걸 실감한다.


나는 불안이 심해질 때마다 길을 걸었다. 걸으며, 어떤 기적이 나에게 찾아오기를 바랐다. 마음을 누르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러한 일이 우연처럼 펼쳐지지는 않을까 하며 산책을 핑계 삼아 거리를 쏘아 다녔다. 하지만 그 시기들을 천천히 돌아보면 나에게는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 나는 내 마음속 켜켜이 쌓인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물어봐 줄 존재를 애타게 찾아다녔다. 지치지 않고서는 좀처럼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사람을 낯선 거리에서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내가 어떤 일을 겪었든, 그 일이 나의 실수나 잘못으로 벌어졌을지라도 포근한 품을 내어주며, 언제든 다시 찾아와 마음을 누이고 가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만약, 이러한 위로를 나눠줄 존재가 '나'였으며,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나는 기적에 가까운 누군가를 그토록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불안을 내가 느끼는 감정의 일부이다. 비록 자주, 강하게 느끼기는 하지만 '나' 자체는 아니다. 나는 내가 느끼는 불안보다 크고 용감하다. 그렇기에 나는 불안이 야기한, 지금 느껴지는 공허함을 물리치기 위해 어떠한 외부적 행동도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공허함과 그 이면에 있는 불안을 외면하거나 억제하지 않은 채 그저 놓아둠으로써 보다 적극적인 대처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나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한,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의 나는 공허하지 않다. 이 글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힐까 조심스럽지 않고, 이 글이 사랑받지 못할까 봐 불안하지도 않다. 나는 지금의 '나'를 진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의 마음은 자연스러우며, 자유롭다. 오늘, 이 밤에도 길을 걸어볼까 한다. 물론, 누군가를 찾기 위함은 아니다. '나'와 만나기 위해서이다.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내일의 내가 다시 하나씩 해결해 나갈 것이라 믿는다. 오늘은 다만 바쁘다는 이유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나'와 소중한 시간을 보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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