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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워진 잔을 탁자에 내려놓는다. 하아- 뜨거운 한 숨이 퍼지는 밤하늘엔, 흔한 달빛조차 없다. 갈 곳 잃은 눈에 힘을 풀며 나는 생각했다. 망망대해 같은 하늘을 내가 멍하니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저 어딘가에 너의 흔적이 남아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걸까. 오늘도 어김없이 이 곳에 들렀다. 네가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한숨을 내뱉기 위해 벌어졌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다시 들이마셔야 하는데. 숨이 아닌 술을 마시고 싶은데, 자신이 없다. 그 날. 너는 나에게 남아있던 술을 모두 따라주었고, 서로의 잔엔 비슷한 양의 술이 담겨 있었다. 다만, 너의 잔에는 진한 눈물이 섞여 있었지만.
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별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그동안 쌓았던 추억에 비례할 만큼 구구절절한 이유를 말해주길 바랐는데, 너는 '헤어지자'는 말만 했다. 너를 잘 알고 있던 만큼, 당시 네가 지었던 표정은 내가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린 그렇게 끝났다. 나는 너에게 어떠한 여운도 남기지 못한 채 잔을 들었다. 슬퍼하는 널 볼 자신이 없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멈춰버린 것 같은 시간을 비집고, 이별이 주는 잔을 비웠다.
상상해보았다. 앞으로 나는 너에게 인사를 건네지 못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너의 체온도 느끼지 못한다. 너의 손을 잡고 걷지도 못한다. 네가 힘들어하는 일들에 소소한 위로도 해줄 수 없다. 늦었다며, 미안해하는 얼굴로 달려오는 너를 품에 안아줄 수도 없다. 다시는, 다시는.
오늘, 나는 어김없이 한 잔의 술을 남겨두고 있다. 잔에 담겨있는 술이 사라지면, 네가 떠난 마지막 순간을 비우는 것 같을 까 봐 손 끝이 떨린다. 하릴없는 눈물이 새어나오며 잔에 떨어진다. 나는 그런 사실도 모른 체 술을 삼켰고, 몇 남지 않는 추억도 함께 사라졌다. 그 날, 네가 마셨던 술은 이런 맛이었을까.
가게에서 나왔다. 노을이 질 즈음이면 다시 찾아오겠지만. 찬 바람이 불어와 달아오른 볼을 어루만진다. 터벅터벅. 습관처럼 바닥을 보고 걷는데, 어느 누구도 앞을 보라고 걱정해주지 않자 괜히 서럽게 느껴진다.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참고 참았던 네가 간절해지는 새벽 2시가 되었다. 자연스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너에게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하며.
야속하게도, 하필 너에게 상처 주었던 몇 가지 일들이 떠오른다. 이별하고 난 뒤에야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이었는지. 허나 너는 나에게 아무런 불만도 털어놓지 않았다. 이렇게 헤어질 거였으면, 차라리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아니, 어쩌면 너는 자주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언제부턴가 나를 향한 너의 사랑은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후회하고 있다. 매일, 매 시간, 매 분, 매 초. 너와 나 사이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란 믿음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고, 보통 연인들과는 다른 '우리'라는 생각에 집착했던 날들을.
차마 너에게 연락하지 못한 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아 실컷 울기로 결정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차올라 목 언저리를 서성이지만, 전할 수 없는 말들은 하얀 연기가 되어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나의 곁을 떠난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새벽이 되면, 아직 너를 그리워한다. 좋아했으니까. 좋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