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 2월의 어느 날
비가 내린다. 놀라움에,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종종 넋을 놓아버리곤 하는데, 지금이 딱 그러하다. 깜빡 잊고 있었다. 분명, 어젯밤 일기예보에선 비가 내린다고 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우산을 펴니, 그 위로 맺히는 새로운 계절에 가슴이 미어진다. 이상하다. 겨울이었는데, 벌써 봄이 온건가.
비가 내리고 있다. 세상엔 어둠이 드리웠다. 촉촉이 젖어가는 땅이 보이고, 알 수 없는 쓰라린 감정이 든다. 요즘 나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아니면, 아니라면 쓰라린 감정 따위 누구나 느끼는 평범함이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문득 봄 비와 관련된 두개의 기억이 떠올랐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네가 보인다. 너는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분명, 나에게 무슨 말을 건네는 것처럼 보이는데 빗소리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흐려진 걸까, 흩어진 걸까. 선 채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곁을 지나쳤을까? 차츰 잦아들던 너의 얼굴에선 비만 내리지 않았을 뿐, 여전히 밝지 못했다.
비가 내렸다. 그 날엔, 비는 내렸지만 하늘은 어둡지 않았다. 은은한 미소를 품었던 너와 마주한 덕분이었을까. 그렇겠지. 별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그곳은 바다였다. 물을 무서워하던 너는, 파도를 앞에 두고 탄성을 내지르며 나의 손을 꼬옥 잡았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인 양 지켜보던 너의 굳은 몸과는 다르게, 표정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나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심 뿌듯했다. 그동안 내가 너에게 주었다고 믿었던 배려는 나만의 것이었다. 받아들이는 너에겐 큰 부담이었겠지. 내가 만들어낸 사랑이라는 '정의'에 빠져 한참을 너에게 소홀했지만, 적어도 파도로부터 지켜줄 수 있다는 생각에 벅차올랐다. 나는 그 순간을 곱씹었다. 부디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함께. 하지만, 점점 굵어지던 빗소리는 머지않아 나의 상상을 깨트리고 말았다.
투명우산에 글썽이는 봄비를 보며, 바다에 함께 있었던 '우리'가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온몸을 쓸어내리는 아련함에 탄식이 새어나오는 한편, 우산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는 한 줄기 빗방울이 메마른 볼을 타고 흐른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나 보다. 때로는 진한 울림을 주던, 한편의 영화 같던 추억은 왜 이렇게 희미해져 가는 걸까.
어, 갑자기 눈이 내린다. 참 희한한 일이다. 시기심 강한 겨울이 아직 봄을 받아들일 준비가 덜된 걸까. 쏟아지던 비와는 다르게 숨 멎을 듯 차분히 내려오는 눈송이는 한 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비는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서투른 감정을 지닌 겨울은 덜컥 비를 내렸고, 나는 비에서 잊고 있었던 그 날의 너를 보았다.
구슬 빛 파도치는 새하얀 모랫바닥. 일렁이는 물결에 발 한 뼘 적시고서 화들짝 놀라 뒷걸음치던 너의 모습이 선명해서일까, 아련해서일까.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