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근거림 Nov 17. 2022

자신의 동네가 누군가의 여행지가 되듯

저는 홍은동이라는 곳에서 30년 넘게 살았어요. 저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동네이지요. 아마도 홍은동을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음, 그럼 제가 잠시 우리 동네를 소개해볼까요? 홍은동은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곳이에요.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는 홍제역과 녹번역이 있어요. 또한 인근에는 상명대학교, 서울여자간호대학교, 명지전문대학, 명지대학교 등 많은 대학들이 자리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 동네의 대표적인 자랑거리로는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나왔던 포방터시장이 있어요. 시장의 명칭은 우리가 아는 대포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요. 그곳에는 백종원 아저씨가 극찬했던 연돈(지금은 없지만..), 어머니와 아들(홍탁 집) 같은 식당들이 있어요. 


다른 누군가에게 동네를 소개할 때는 이처럼 유명한 것들을 먼저 떠올리고는 해요. 누가 들어도 알 만한, 혹은 설명하면 알아들을 것 같은 무언가를 말하게 되지요. 저 또한 습관처럼 '뭐가 유명하지?'를 생각하다 보니 첫 문단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적었어요. 하지만 제가 나고 자란 홍은동에는 외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저만의 유명 거리들이 참 많아요. 제가 초등학교(저는 국민학교로 입학하여 초등학생으로 졸업한 세대예요..^^)에 다닐 때만 해도 포방터시장 안에는 세 곳의 문방구가 있었어요. 그곳은 각각 금성 문방구, 칠성 문방구, 우리 문방구였어요. 저는 주로 장난감을 사러 금성 문방구에 갔었어요. 제가 유독 그 길을 좋아했었거든요. 또한 근처에 김 가게가 있어서 고소한 냄새가 하루 내 퍼지던 길이기도 했어요. 깜빡했던 준비물을 등굣길에 사야 할 때면 세 곳 모두 들를 때도 있었어요. 집에서 가까운 칠성, 금성, 우리 순으로 갔었는데, 우리 문방구에 이르러 애타게 찾던 준비물을 사던 순간의 안도감은 여전히 잊을 수가 없네요.


그렇지만 역시 추억을 얘기할 때에 분식집을 빼놓을 수가 없겠어요.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그러니까 국민학교에 다니던 때 하루 용돈이 300원이었어요. 등교는 걸어서 했었고, 하교할 때는 버스를 탔었는데 버스비가 100원이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쓸 수 있는 돈은 200원이었지요. 홍은초등학교에서 정문으로 나와 실내화 가방을 흔들며 또래 친구들 곁을 열심히 지나치면 작은 다리가 하나 나왔어요. 그곳에는 번데기와 아이스크림, 병아리를 파는 할아버지가 계셨지요. 어떤 애가 그곳에서 산 병아리를 닭까지 키웠다는 후일담이 동네에서 가끔 들리기도 했어요. 그 다리를 건너서 우리 문방구를 지나고, 생선가게를 지나고, 왼쪽 골목으로 꺾은 뒤에 금성 문방구를 지나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박선규 치과의원 간판이 보이고, 그 옆에 단골 분식집이 있었어요. 간판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떡볶이를 팔던 할아버지의 얼굴만 선명하게 떠올라요. 그곳에는 여러 가지 꼬치를 팔았었는데 저는 주로 어묵꼬치를 먹었었어요. 당시 금액으로 200원이었는데, 저는 항상 떡볶이 소스를 묻혀달라고 말했었죠. 요즘에는 "나 먹는 거에 관심 없어~"라고 말하고 다니는데, 돌이켜보면 취향이 확고했었네요. 


그리고 친구 영이와 자주 가던 분식집이 있었어요. 그곳은 옛날 문화문고가 위치했던, 현재는 새마을금고가 위치한 건물을 등지고 걸어가면 금방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 주변에 살던 영이를 따라 처음 갔었고, 그 이후로 우리는 주머니에 있던 잔돈을 모아 다 같이 떡볶이를 사 먹었었어요. 하루는 양이 부족해서 옆 테이블에서 남긴 순대를 집어먹은 적도 있었어요. 그 순대의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게 뭐가 그리 즐겁다고 친구들과 함께 실컷 웃었던 순간이 떠올라요. 현재는 포방터시장 안에 왕자 떡볶이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옛 추억을 회상하며 최근에 혼자 사 먹어보았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을 머금게 되더라고요. 아무튼 그 외에도 지금은 사라졌지만 메추리알 꼬치를 팔던 곳, 순대 튀김을 팔던 곳처럼 혼자서, 혹은 친구들과 어울려 먹었던 분식집들이 그 주변을 걸을 때면 제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나고는 해요. 


적다 보니 소개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떠올라요. 마을버스 11, 13번의 정류장 중에 포방터시장 이후 정류장이 포방 슈퍼(현 포방 공영주차장)로 불렸던 이유도 최근에 이사 온 분들은 아마 모르실 거예요. 현재는 홍박 공원이 있는 주변에 포방 슈퍼가 있었거든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리고 몇 년 전이지만 여전히 정류장 이름이 포방 슈퍼로 불리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어요. 그만큼 동네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새로 온 사람들에게는 낯선 면들이 어느 동네에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일까요. 저는 익숙한 우리 동네를 걷는 것도 좋아하지만, 낯선 다른 동네를 걷는 것도 좋아해요.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고 할까요. 여행을 다닐 때도 관광명소보다는 그곳의 시장이나 동네를 경험하는 것을 선호해요. 조치원 도시재생 서포터스에 작가로 참여했을 때도 세종전통시장과 그 주변을 팽이 돌듯 돌았고, 제주에 가면 동문재래시장의 죽돌이가 되어 이것저것 사 먹으며 돌아다니기도 했어요.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곳은 양재동의 어느 동네였어요. 그날 저는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하여 결혼식에 간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카페에 앉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몸이 근질근질하더라고요. 그 당시의 저는 어느 대학교에서 조교로 근무하고 있었어요. 말이 조교지 직원에 가까웠어요. 주된 업무는 전화 응대였어요. 바쁠 때는 앞선 전화를 끊자마자 전화벨이 다시 울리는, 체력 소모가 큰 곳이었지요. 그러한 일을 할 때에 사람들이 제 기대만큼 친절했다면 좋았으련만. 저에게 고함을 치는 사람도 있었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저는 그들의 성이 난 언어와 목소리를 고스란히 들으며 마음에 담아두었었죠. '내가 왜 욕을 들어야 하지?' '내가 꼭 기분이 나빠져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전화는 다시 걸려왔고, 저는 작아드는 제 목소리를 느끼며 또다시 친절하기 위해 노력했었죠.


저는 마시던 커피를 남기고, 거리로 나갔어요. 양재동은 제가 처음 가보다시피 하던 낯선 동네였어요. 카페 앞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어디로 이어지는지, 무엇이 나오는지 알지 못했어요. 하지만 걷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확실했어요. 친구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저는 무작정 걸어보기로 결심했어요. 차도가 이어지는, 차들이 마치 조교로 일하던 저에게 큰소리치던 누군가처럼 떠들어대는 그곳을 계속 걸었어요. 발길이 닿는 대로, 생각이 이끄는 대로 나아갔어요. 그렇게 길을 따라 걷다가 자연스레 굽이진 곳에 들어섰어요.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가며 걷다 보니 한산한 어느 동네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시장이 있고, 차들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고, 한 손에 무언가를 든 사람들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니는 그곳은 제가 살아가던 세상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어요. 한낮의 봄 햇살이 고스란히 머물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포근한 그 길을 따라 나무의 푸르름도, 주민들의 삶 소리도, 짙게 배어 나오던 발바닥의 땀도, 고르던 호흡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제가 마치 동네를 걸어 다니는 타인이 아니라, 동네의 일부가 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사람과 동네, 그리고 제가 모두 연결된 것 같다는 그런 마음을 느꼈어요.


제가 다른 동네를 여행하듯, 누군가는 저의 동네로 여행을 올 거예요. 저와 함께 살아가는 많은 이웃들이 포방터시장이 궁금해서, 혹은 다른 이유로 우리 동네에 발을 들일 거예요. 그중에는 누군가는 유명하다고 여겨지는 어딘가로 곧장 향할 테고, 또 그중에 누군가는 제가 양재길을 걸었을 때처럼 골목, 골목을 우연히 떠돌게 될 수도 있어요. 만약 후자라면 우리 동네 깊숙이, 저의 추억이 머무는 길을 따라 걸어보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맛있는 음식도 많고, 이웃들도 친절하며, 무엇보다 제가 살아갔고 사랑하는 동네이니까요. 저는 우리 동네를 위해, 또한 다녀갈 누군가를 위해 오늘도 다정한 마음으로 길을 걸어볼게요.  

 

Image by 피어나네 from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역할이 바뀌기 전에, 숨 한번 고르는 건 어떨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