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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Nov 16. 2022

역할이 바뀌기 전에, 숨 한번 고르는 건 어떨까요?

우리는 모두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며 살아가요. 저는 현재 백수이자, 아들, 삼촌이자, 친구, 전 동료라는 역할들을 맡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떠올리지 못하는 또 다른 역할로 누군가가 저를 찾게 될 거예요. 


많은 역할 중에 제가 백수라는 것을 의식할 때면 저는 의기소침해져요. 제 자신이 무능한 것만 같고, 뒤쳐진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거든요. 반면에 아들이라는 것을 의식할 때면 저는 자유분방하게 변해요. 제가 편하게 까불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부모님(?)이거든요. 초등학생 때는 부모님께 깍듯하게 행동하며 동네 어른들에게 의젓하다는 칭찬을 받았었지만, 요즘에는 당장에 내쫓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편하게 대하며 지내고 있어요. 


이처럼 역할에 따라 행동하는 방식도 달라지고, 느끼는 기분도 제각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백수라는 역할에 골몰하던 제가 아들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여유가 필요해요. 백수에 심취한 저는 무망감의 늪에 빠지고는 해요. 하루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느끼며 이력서를 쓰는, 직장인의 삶을 상상하며 취업이라는 문턱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순간들은 '쓸모없는 나'라는 생각에 쉽게 빠져들도록 만들거든요.  


하지만 저는 구직 활동을 할 때만 백수이지, 매 순간에 백수는 아니에요. 때때로 백수라는 호칭으로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할 때면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끼지만, 저는 부모님의 아들이자 우진이와 서진이의 삼촌이기도 해요. 또한 제가 맡게 된 역할들은 고정된 것이 아니에요. 시간이 지나며 달라지기도 해요. 언젠가 백수라는 역할도 직장인으로 변할 테고, 아들이었던 제가 한 아이의 부모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요. 


과거에 학생상담센터에서 근무했을 때의 저는 행정업무자와 상담자라는 구분된 역할을 수행했었어요. 먼저 행정 업무를 하던 저는 대체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어요. 사업 계획부터 지출 결의, 내담자 응대처럼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다 보면 자연스레 실수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집중이 필요한 여러 일을 동시에 하며 몸과 마음이 과열 상태에 접어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반면에 상담 업무를 할 때면 여유로운 마음 상태를 유지할수록 상담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상담자가 내담자의 언어를 그의 입장에서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안정이 어느 정도 필요하더라고요. 행정업무자와 상담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던 초기에는 이러한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어요. 두 가지 모두에 그저 최선을 다했지요. 행정 업무가 많을 때면 부랴부랴 상담실에 들어가게 되는 경우도 있었어요. 물론 그날의 상담을 위해 별도로 시간을 내어 준비했었지만, 조급하고 날카로워진 마음을 여유로운 마음으로 전화하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어요. 


이처럼 행정업무의 여파가 상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 이후부터 저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어요. 그 노력은 센터에서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되었어요. 저는 상담 회기가 시작되기 10분 전에 몰래 센터 밖으로 나갔어요. 주머니에 이어폰을 넣고, 핸드폰을 챙겨 근처 화단으로 조용히 걸어갔지요. 저는 그곳에서 듣고 싶은 노래를 듣기도 하고, 화단을 바라보기도 하고, 눈을 감고 가만히 호흡에 집중하기도 하며 의도적으로 멈추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렇게 그 당시의 마음을 느껴보고, 알아차리고, 곧 하게 될 상담에 대해 생각해보았지요.    


효과는 분명했어요. 역할을 전환하는 데에 쓰이는 주의와 에너지가 줄어들었거든요. 저는 저 스스로 의도한 10분 간의 멈춤을 통해 상담자로서의 역할에 보다 전념할 수 있었어요. 흔히들 비워야 채울 수 있다고 하잖아요. 행정 업무의 영향으로 예민해진 감각이나 부정적인 감정들은 그렇게 되거나, 느낄 수밖에 없었던 저를 알아차릴수록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퇴사하기 전까지 남몰래(?) 사라지고는 했지요.


여러분은 주로 어떤 역할을 맡고 계신가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어떤 역할로의 전환을 앞두고 계신가요? 만약 역할의 전환을 앞두고 계시다면 그에 앞서 낼 수 있을 만큼의 작고 짧은 여유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진실한 마음이 바탕이 된 여러분의 모습을 보며 누군가가 슬며시 미소 지을지도 모르니까요. 


Image by S. Hermann / F. Richter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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