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근거림 Jan 25. 2023

기댈 곳이 필요한, 어느 새벽에

추석이나 설날처럼 긴 연휴의 마지막 날이 되면 마음이 울적해진다. 출근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미뤄두었던 일이나 다시 만나게 될 회사 사람들, 사무실이라는 공간이 저마다에게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하지만 내일 아침 출근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보는 직장인들의 마음은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나는 '가기 싫다'는 생각을 하며 현실에 저항하고 있다. 이러한 저항은 나의 욕구를 외면하는 것으로써 세상에 나타난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연락을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외부 활동이 있어도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다가오는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나는 오늘을 더 의미 있게 살아야 할 것 같고, 내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고, 어제와 같은 여유가 내게 다시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지난주에는 두통으로 고생을 했다. 월요일부터 회사에서 하는 작은 행사를 도맡았었고, 그날 함께 생겼던 몇 가지 사건들로 몸과 마음이 고생했던 게 원인이었던 것 같다. 나는 화요일부터 시름시름 앓으며 출근을 했다. '그냥 휴가를 쓸까?' 생각하다가도 하루뿐인 휴가를 아파서 쓴다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근무와 퇴근, 잠과 출근을 이어가다가 목요일 오후에 결국 반차를 썼다. 집으로 돌아와 오직 잠을 잤다.

 

그렇게, 금요일을 버티고 설날이 찾아왔다. 모처럼 찾아온 4일간의 휴식. 이곳에 입사하기 전, 4개월 동안 백수로 지냈을 때만큼 편안하지는 않겠지만 쉬어갈 수 있는 상황이 그저 감사했다. 토요일에는 동은이를 만났다. 동은이와 저녁을 먹고,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지난 한 주 동안 두통 때문에 힘들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지금은 기적처럼 어떠한 통증도 머리에서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동은은 말했다.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다고. 그의 말을 들으며 내려놓았던 아메리카노가 잔 속에서 심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마치 회사에서 '나'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내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에 두통을 특별히 경험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갑자기 머리를 조이는 듯한 통증을 며칠간 느꼈다는 건, 아마도 스트레스 때문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동은이 말하지 않았어도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말을 들으며 보았던 아메리카노의 뜨거운 떨림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동은과의 시간을 기록하는 지금,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마음이 드는 까닭은 회사에서의 '나'가 계속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입사 한 달 차, 나는 경력직이면서도 신입 사원이다. 관련 경력을 5-6년 가지고 있지만, 이 회사에서의 삶은 처음이다. 지난 경력이나 나이를 막론하고 나보다 일찍 입사한 동료들을 선배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비단 내가 맡은 일뿐만 아니라 청소나 물건을 옮기는 공동의 일을 할 때에도 나는 한 걸음이라도 더 움직이기 위해 노력한다. 이게 그동안 내가 살아온 방식이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나만의 비법이다. 덕분에 나는 이전 직장들과 비교했을 때, 한 달이라는 기간 치고는 동료들과 많이 가까워질 수 있었다.


사실 동료들이나 상사들과의 관계보다 나를 괴롭게 하는 건, 내가 맡은 업무이다. 나는 요즘 전화 업무를 주로 하고 있다. 내가 담당하는 서비스를 신청하는 사람들을 응대하는 일이 하루 대부분을 차지한다. 전화를 거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나에게 말한다. 그리고 나는 규정에 근거하여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개개인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은 명확하게 구분하여 전달하는 부분도 필요하다. 자연스레 한 명과 통화를 하더라도, 그 시간이 5분 내외더라도 나는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나는 긴장하고, 다른 업무에 집중하다가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나는 일을 한 가지씩 맡아 해결하는 것을 좋아한다. 끝이 나야만 안심을 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내가 맡은 일은 당장에 끝마칠 수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고객들의 요구는 우선적으로 내부 시스템에 차곡차곡 쌓인다. 일정한 대기 기간을 거친 뒤에 순서가 돌아오면 나는 비로소 개개인에게 회신 연락을 한다. 그들의 사연이, 절실한 외침이 내 마음 어딘가를 떠돌며 도와달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에는 한계가 있고, 내가 더 노력하지 않으면, 애쓰지 않으면 그들의 외침이 끝없는 메아리로 남게 될까 봐 걱정이 된다.


전화를 받고, 그들의 말을 정리하고, 다른 일을 하고, 다시 전화를 받고. 사무실에서 나는 늘 긴장하고 있다. 거북목이 되었다거나 허리가 구부정해진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해내기 위해 힘쓴다. 이는 분명 내가 살고 싶은 삶도, 하고 싶은 일도 아니다. 나는 근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상상을 하고는 한다. 내게 근사한 사람이란 일과 일상을 어느 정도 분리한 채 살아가는 이다. 근무 시간에는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고, 퇴근 이후에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런 근사한 인생을 꿈꾼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근사해지지 내 삶이, 나의 직장 생활이 어쩐지 불행하게 느껴진다.     


알고는 있다.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고, 그 최선에는 미련이 크지 않아야 할 것이며, 최선을 다한 스스로를 존중하고,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인정하며 그 부족한 부분을 1mm씩이라도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일에 대한 마음의 걸림은 덜할 것이다. 알고는 있는데, 왜 나는 자꾸 잘하려고만 하는 걸까. 나는 왜 합리적이어야만 하는 걸까. 그게 직장인으로서, 맡은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옳다는 것은 알겠지만, 나는 또한 한 명의 작은 사람일 뿐인데. 조금 더 편하게 일할 수는 없는 걸까.


생각해 보면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보다는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을 더욱 부러워한다. 만족에는 아쉬움은 따를 수 있으나 후회는 없다. 후회는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갖는 애끓는 감정이다. 만족에는 의연한 미소가 함께 한다. 나는 1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하며 회사를 4, 5번 옮겼다. 사람들은 물론 저마다의 이유로 이직을 한다. 회사에 적응하지 못해 이직을 해왔던 나는 한 곳에서 오래 근무한 사람들을 자연스레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내게는 첫 직장에 함께 입사했던 수일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는 꼼꼼하고 친근하며 다정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어느 환경에 가도 이내 사람들과 어울리며 적응할 것 같은, 둥글둥글한 친구이다. 그는 여전히 첫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는 2년을 간신히 버티고 퇴사했으니 나에게는 전 직장, 그에게는 현 직장의 얘기는 더 이상 우리 사이의 공통분모가 되기 어렵다. 그는 일찍이 진급을 했고, 중간 관리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나는 수일이의 직급이나 경력보다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 때로 존경스럽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묵묵한 수일이의 고충은 분명 많을 것이다. 후배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거나 해소해줘야 할 때도 있을 테고, 상사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때도 많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일을 해내야 하고, 후배와 상사 사이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일이는 그러한 삶을 감내하고 있다. 회사의 일이나 관계가 불만족스러울 때도, 힘들 때도, 두려울 때도 그는 하루씩 살아갔다. 


자신의 삶에 그럭저럭 만족할 줄 아는 수일이와 후회로 가득한 나의 차이는 '어울림'에 있다. 수일이는 일이 바쁘거나 힘들 때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는 듯했다. 일이 많거나,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사람들과 만나는 시간을 줄여갔던 나와는 사뭇 다르다. 그는 관계 속에서 나누고, 깨달으며, 균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맞다. 소중한 누군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삶을 기적적으로 바꾸지는 못 하지만, 일에 대한 지나친 생각에서 벗어나 저마다의 온전한 숨을 내쉴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다. 내가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후회했고, 후회하고 있는 건 일 때문에 포기했던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과의 접촉이다. 나는 내가 분명하게 기억하는 고등학교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드문드문 기억하는 유년 시절부터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나는 누군가를 자주 기다렸다. 추운 겨울에 수학 학원 앞에서 동욱이 형이 어서 나오기를 한 시간 넘게 기다리기도 했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목이 터져라 울며 사라진 엄마가 어서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나는 나에게 다정하게 웃어 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사랑받고 싶었다. 괜찮다는 말이 필요했다. 스스럼없이 안아주기를 원했다. 


여기까지 오니 이제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나에게는 한 일이나 해야 할 일에 있어서 그런대로 만족할 수 있는 마음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와의 시간이 필요하다. 실수를 하거나, 결과가 썩 만족스럽지 않거나, 그 순간에 당장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더라도 '이게 나의 최선이야'를 생각할 수 있는 확신, 불끈 쥔 주먹을 기억해야겠다. 그리고 일의 혼란이 회사 밖 일상에 침범할 때도 내가 애타게 찾아 헤매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아야겠다. 마음을 나누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는 이들에 대한 감사함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다.  


나는 아직 해보고 싶은 게 참 많다. 친구들과 어디로든 여행을 떠나보고도 싶고, 영화 라라랜드의 셉스와 같은 재즈바에 가서 칵테일을 마셔보고도 싶다. 축구를 다시 시작하고 싶고, 입맛을 당기게 하는 맛있는 음식도 더욱 먹어보고 싶다. 바다멍을 때리고도 싶고, 산 정상에 올라 야호-하며 크게 소리치고도 싶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나의 굽고 마른 등을 토닥여 줄 따뜻한 손을 만나고 싶다.  


Image by StockSnap from Pixabay


"괜찮은 척하지만 사는 게 맘 같지는 않네요
저마다의 웃음 뒤엔 아픔이 있어
하지만 아프다고 소리 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요 나 기댈 곳이 필요해요
그대여 나의 기댈 곳이 돼줘요"                           


<가수 싸이의 기댈 곳 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iAEM8KGTl_E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한 곡의 햇살을 위해 살아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