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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Jan 15. 2023

나는 한 곡의 햇살을 위해 살아간다

"어, 수호샘은 오늘도 컵밥을 드시네요"


점심시간이 되면 동료는 묻고는 한다. 오늘도 컵밥이냐면서. "어제랑은 다른 맛이에요" 웃으며 동료에게 김치볶음밥이 적힌 포장지를 보여준다. 전자레인지로 1분 30초. 밥을 데우고 소스를 넣고 비비면 완성이다. 컵밥은 그저께 먹은 맛과 같다. 특별한 없는 맛에 동료들의 말을 반찬삼에 숟갈씩 삼킨다.


사내식당이 없는 회사에서는 오후 12시가 되면 진풍경이 벌어진다. 배달 음식을 기다리는 동료, 식당으로 달려 나가는 동료, 간편 음식을 데우기 위해 전자레인지와 커피포트로 향하는 동료처럼 식사를 위해 제각기 흩어진다. 나는 늘 그랬듯 먹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다. 맛있는 음식을 물론 좋아하지만, 회사라는 공간이 주는 스트레스로 입맛은 좀처럼 돋아나질 않는다.


새로운 곳에서 일을 시작한 지도 한 달이 꽤 넘었다. 나는 적응하는 시기라고 할 것도 없이 온갖 업무에 투입되고 있다. 하루에도 촌각을 다투는 여러 일을 처리하며 지냈던 요즘 나의 상태는 식사량으로 대신 설명할 수 있다. 평일의 나는 밥을 한 끼에 반공기 이상 먹지 않는다. 거를 때도 많다. 식욕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주말이 되면 사라졌던 입맛은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든다. 먹어도 먹어도 더 먹고 싶다며 마음은 아우성을 친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걸려오는 전화. 한 통의 전화를 해결하고 나면 이어지는 서류 작업. 이래저래 집중해서 일을 하고 있다 보면 생겨나는 또 다른 일들. A 업무를 마치고 B 업무를 순서대로 시작한다는 것은 꿈속의 달콤한 이야기인양, 닥쳐오는 시급한 일들부터 급급하게 처리하는 나의 하루. 불안하고 다급한 나의 마음.

 

회사에서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나는 취미, 친구, 운동을 포기해 갔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일찍 퇴근해서 집에 도착해도 오후 7시가 넘어가기 일쑤고, 무언가를 하자니 누워서 쉬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일과 잠, 그 사이에 단조로운 식사만이 나의 일과가 되었다는 것이 때때로 눈물이 차오를 만큼 슬프게 느껴진다. 


힘겹고 괴로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벌써부터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긴박한 삶 속에서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순간이 있다. 나는 방전된 채로 돌아가는 퇴근길보다 채워진 채로 향하는 출근길을 더 좋아한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용산구에 있다. 나는 3호선을 타고 약수역에서 환승을 해 회사로 출근한다. 


40분 동안 지하철과 수많은 사람들 틈에 갇혀 있는 나는 출구로 나오자마자 마스크를 턱까지 내리고 숨을 깊게 들이쉰다. 코로 시원한 공기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가방에서 꺼낸 커피우유를 마신다. 발걸음은 주말에 산책을 할 때와 비슷하다. 커피우유를 한 모금씩 머금고, 혀로 전해지는 단맛을 차분히 느낀 뒤에 마시며 오직 걷는 순간의 나에게 집중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따금씩 회사에서 해야 할 일이 떠오르거나, 발이 빠른 동료가 나를 앞질러 가는 것을 보며 조급해지거나, 괜스레 울적한 마음이 들어도 휩쓸리지 않고 "하이" 인사를 건넨다.


지하철 출구에서 10분 정도를 걸어가면 회사로 가는 마지막 신호등 앞에 도착한다. 그 신호등 사이에는 도보가 있다. 중간에 있는 그 도보로 가서 왼쪽 방향으로 꺾어야 회사에 다다를 수 있다. 나의 마음이 한 편의 글을 써내려 갈 때, 가까운 친구와 수다를 떨 때, 고즈넉한 길을 걸을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로워지는 순간은 바로 가운데 도보에서 회사에 이르는 4분 남짓의 시간이다.


그 길에 서면 지하철 출구에서부터 왼쪽 뺨으로 드문드문 비치던 해가 얼굴 전체를 감싼다. 한 걸음씩 더할 때마다 밤을 새우고 집으로 돌아온 여느 겨울날, 옷만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쓸 때의 첫 느낌처럼 포근한 마음이 몰려든다. 그곳에서의 나는 충분하고, 충만하며, 충족된다. 헤드폰으로 들려오는 음악에, 뽀드득 거리며 단단해지는 눈소리에, 고요하게 퍼지는 숨소리에 귀를 세우다가도 마음에게 다시 "안녕" 웃으며 인사한다.   


회사로 들어가기 직전의 갈림길에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리면 비스듬하게 깎은 듯한 지면 위로 나란히 들어선 주택들이 보인다. 햇빛이 골고루 쏟아지고 있는 그곳은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리스의 산토리니가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아름답다. 나는 나와 같이 해를 마주하고 있는 그곳을 또한 지긋이 바라본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저곳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 평화로울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풍경과는 다른 현실에 한숨이나 탄성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어지럽다는 것을 순간 알아차리면 나는 눈을 감는다. 호흡에 집중한다. 가만히 머물며 그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집중한다.


회사로 가는 갈림길에 서서 보내는 시간은 대략 2분. 가운데 도보에서부터 갈림길까지 걸어오는 데 걸리는 2분가량을 더한 4분을 나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꼽는다. 글을 쓰지 못하고,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고, 따로 걷지 못하는 요즘의 나는 나에게 오롯이 빠지는 출근길을 사랑한다. 최근에 내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고통은 회사에서 비롯되지만, 회사로 다가가는 길을, 스트레스로 가득한 경험의 장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만나는 한 곡의 햇살을 위해 나는 살아간다.   


Image by Pexel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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