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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Jan 29. 2023

글쓰기, 20분이라는 기적의 순간

글쓰기의 유익함은 내가 애써 적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보거나, 작가의 강연을 보면 알맹이 같은 경험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자기 체험이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나는 때때로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한 체험 안에서 우리는 이해하고, 웅크리고, 나아가고, 좌절하고, 멈추고, 숨을 쉰다. 이러한 체험의 순간은 값으로는 결코 매길 수 없으며, 익어가는 '나'라는 열매를 발견해 가는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 나는 삶에서 다가오는 고통을 기꺼이 마주하고 있다. 


글쓰기 책이나 작가의 강연에서는 직접 글을 써볼 것을 권하고는 한다. 글을 써보아야 그 유익함을 몸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제도 글을 썼다. 나는 금요일마다 탄력근무를 한다. 오후 12시가 지나서 출근하고, 밤 9시가 넘어야 퇴근한다. 그 사이에는 저녁밥을 먹을 수 있는 한 시간의 여유가 주어진다. 평소 같았으면 식당으로 가서 끼니를 때웠을 것이다. 하지만, 회사 일로 스트레스가 많은 요즘 무언가를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는 것 또한 귀찮게 느껴진다. 


출근하며 사 온 빵을 먹기 위해 휴게실로 갔다. 휴게실은 한 평 남짓하다. 가운데에 원탁이 있고, 의자는 서너 개 정도 있다. 창문을 오른쪽에 두고 나는 학술지에 투고해야 하는 논문을 읽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업무로 과열된 몸과 마음은 '쉬고 싶다'는 메시지를 나에게 전하는 것 같았다.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헤드폰으로 들려오는 음악에 눈물이 계속 새어 나왔다. 


나는 출력한 논문의 뒷장을 펼쳐 글을 적기 시작했다. 시간도, 분량도, 내용도, 아무래도 좋았다. 마음을 그냥 편하게 풀어놓을 곳이 필요했다. 이미 넘쳐흐르기 시작한, 의기소침하고 울적한 마음이 글을 알아서 적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나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의식하지 않은 채 마음을 옮겨 적는 일에 몰입했다. 배가 고프다는 감각도 잊고, 이곳이 회사라는 사실도 잊고,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나를 몰아세우던 극단적인 생각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게 백지를 채워나갔다.


글을 쓴다는 건 거울을 들여다보는 행동과 같다. 다만, 거울에 무엇이 보이는지 하는 객관적인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하다. 글이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라면, 글을 쓴다는 건 그 거울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살피는 것과 같다. 글을 다 쓰고 나니 내 눈에는 잘 해내고 싶다는 열망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욕구, 그 너머에 잘하지 못해서 사람들 눈에 들지 못했던 웅크린 나의 마음이 보인다. 이런 내 마음과 만나기 위해, 만나려고 오늘 나에게 이 시간이 선물처럼 찾아왔나 보다. 


나는 요즘, 폭풍의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 한 걸음만 떼면 거센 바람에 휩쓸릴 것 같은 삶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자주 두근거린다. 어제는 보다 힘겨운 하루였다. 하루에 수십 통씩 전화를 하는 '나'이다. 어제는 유독 내 마음을 찌르는 전화가 많이 걸려왔다. 높아지는 언성. 떨리는 목소리, 좁혀지지 않는 대화는 나를 잃어가게 했다. 나는 오직 한 통씩의 전화가 무사히 끊어지기를 바랐다.


요즘 들어 부쩍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이전 직장에 다닐 때처럼 방이 지저분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물건들이 책상 위에 집결하여 내가 제자리를 찾아주기만을 기다린다. 외모에도 덜 신경 쓰고 있다. 앞머리가 눈동자를 찌르는 처지가 되었지만, 미용실에 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는 마치 죽지 않았으니 살아있는 사람처럼 주어진 일을 하고,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니까 자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해야 되는 일을 하면서도, 할 수 없는 일조차 해내려고 하는 게 스트레스의 주된 원인이다. 화가 난 상태로 자신의 말만 쏘아붙이는 사람과 이성적인 대화를 시도한다는 건 불가능할 수 있다. 고민해 보겠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생각 정리를 당장에 끝내고 선택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나는 나의 능력에서 벗어나거나, 당장에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고자 집착하고 있었다.


나에 대한 기대를 낮추고, 무엇보다 최선을 다한 나를 어떠한 토도 달지 않고 그대로 다독여줄 마음의 여유가 필요했다. 어느 술자리에서 은수가 "너는 눈빛부터가 따뜻해"라고 말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이고자 했던 그 마음을 스스로에게 돌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 나 최선을 다하고 있지.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요즘 참 많지.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나의 능력 밖의 일인 걸. 애써봐도 좋아. 더 노력해 볼 수 있어. 그렇지만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너는 늘 최선이라는 걸.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아질 거야."


글을 쓰며 나의 마음은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폭풍의 한가운데 중심을 잡고 춤을 추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를 편안하게 움직이며, 마음을 따라 춤을 춘다.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환경 속에 있지만 춤을 추는 이 순간 행복감을 느낀다.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나를 둘러싼 폭풍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샘솟는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고 내 삶으로 걸어가 볼까 한다. 20분간 글을 쓰며 느꼈던 충만한 느낌, 행복감을 마음 한편에 소중히 간직해야겠다. 


Image by Free Photo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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