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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Apr 24. 2023

괴로운 현실과 몸과 마음에 '진실함'으로 머물며

병원에 들렀다. 의사 한 명과 직원 두 명이 근무하는 곳이었다.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진료실로 들어갈게요~" 의사는 왜 이제 왔냐는 듯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내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이내 의사와 나란히 앉게 된 나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 모니터 화면을 쳐다보며 검사 결과를 들었다. 


"당신은 신체의 5% 정도의 능력만 사용할 수 있도록 태어났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의사의 말은 당황스러웠다. '내가 그동안 신체의 5% 정도의 능력만 사용하며 살아왔다니.' 그러나 제한된 신체 능력으로 살아온 그간의 삶을 한가하게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아시다시피 안면은 비대칭이고.." 의사는 알아본 걸까? 어릴 때부터 코가 아닌 입으로 숨을 주로 쉬며 얼굴형이 바뀌게 되었다. 바뀐 얼굴은 아데노이드형이라 불린다. 작고 귀여웠던 어린 시절과 대조적으로 입은 돌출되고, 얼굴은 길며, 턱이 없는 게 특징이다. 


"살면서 집중하는 게 많이 어려우셨겠어요." 맞다, 나는 집중하는 걸 어려워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고등학교 때에 학교에 남아 공부를 제대로 해본 일이 드물다. 대부분은 라디오를 듣거나, 음악을 듣거나, 공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공부에 대한 의지도 없었고, 필요도 느끼지 못했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았다. 교실 형광등이 내게는 날카로웠고, 주변 친구들은 불편했으며, 그곳에 놓인 나는 불안정했다. 


의사가 '아이고, 이 상태로 어떻게 살아왔을까?' 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어쩐지 모르게 그 눈빛에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강한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게 내면에서 느껴졌다. 나를 고스란히 알아주는 듯한 그의 모습에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다. 의사는 말했다. "불안도 자주 느끼시네요. 불안장애까지 있으시고." 혼자 있을 거라고 유추해 오던 불안장애에 대해 의사에게 들으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여기 진료를 제대로 하는 곳이구나.' 들어오며 보았던 허름한 느낌과 의사의 실력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래요. 내가 처방전 써줄 테니 약 잘 먹으며 살아요." 의사는 그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질러진 책상과 진료실 내부, 모니터 상단의 김수호라는 이름을 차례대로 둘러보던 나는 의사가 준 처방전을 들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버스를 타려고 꽤 걸어갔을 때였다. 진료비를 계산하지 않았다는 게 문득 생각났다. 병원으로 다시 가기 위해 가파른 언덕을 한 걸음씩 오르며 '계좌이체하는 방법은 없을까?', '아니야, 의사 선생님이 진심을 다해 진료했는데 직접 가서 내야지'와 같은 생각들을 오갔다.


병원으로 향하며 보았던 처방전에는 2년 치 약을 처방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무려 2년 치나 처방해 주다니. 평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것들인가 보다.' 병원 지붕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을 때, 사찰이 또한 눈에 들어왔다. 이 사찰을 거쳐야 병원에 도달할 수 있겠다고 직감했다. 몇몇 스님들과 불자들을 지나 병원에 이르는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였다. 자신을 도와달라며 어느 할머니가 자신의 양손을 내 어깨에 올렸다. 그때 "나도!", "나도!"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내 뒤로는 어느새 열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기차놀이를 하듯 매달려 있었다. '더 이상 오를 수 없어!' 하는 마음이 거세게 드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깼다.


위의 내용은 며칠 전에 꾸었던 꿈 얘기다. 이 꿈을 메모장에 기록했던 이유는 꿈에서조차 강한 감정 반응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를 꿰뚫어 보듯 정확하고 진실했던 의사의 표현은 위로가 되었다. 마주하는 게 두려웠고, 그래서 피하고 싶었던 나의 상태에 대해 들으니 오히려 편안했다. 꿈에 나타났던 의사는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존재다. 나의 일부이며, 잠재된 '나'이다. 그는 비록 진단하였지만, 알아주는 듯했다. 말하는 듯했다. "그래. 외모도, 집중력도, 자주 느끼는 불안감도 만족스럽지 않을 테지. 그런데 검사를 해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더라."




"야, 너 근데 얼굴이 왜 이렇게 삭았냐?" 

"으잉, 나 삭았어?"

합정에서 오랜만에 만난 승호는 말했다. 

"야, 얼굴이 무슨 대추 색깔 같아."

승호와 나의 대화를 듣던 현수는 말했다.

"낯빛이 진짜 어두운데?"

틀린 그림 찾기를 하듯 그들은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들의 집요한 눈빛에 손등으로 양쪽 볼을 더듬던 나는 '거울로 볼 때는 몰랐는데?' 생각했다.


그들은 내 안색이 얼마나 나쁜지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승호는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카메라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내 얼굴을 이래저래 찍더니 요즘 핸드폰은 보정이 너무 잘 된다며 실제 모습에 가깝게 편집했다. 그렇게 보게 된 사진 속 나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재미를 잃어버렸다. 눈을 감으나, 뜨나 회사 생각이다. 씻거나, 걷거나, 심지어 누군가와 대화하는 순간에도 나도 모르게 시작한 업무에 대한 고민을 의식적으로 멈추기 어렵다. 호흡을 가다듬어도 이내 빠져든다.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 그 전화 중에 내게 호의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정해진 규정 내에서 최대한 유연하고, 정직하게 돕고자 노력하는 나를 다그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전화를 하루에도 수차례씩 받다 보니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하면 심장이 곧장 두근거린다.


이런 일상을 살아가는 내게 얼굴이 폭삭 삭았다는 친구들의 말은 위로가 되었다. 삭을 만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 이직한 회사에서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데, 만약 안색이 좋았다면 몸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일 테다. 마음과 몸은 연결되어 있다. 마음이 고생하는 만큼, 그 고생이 몸으로 드러난다. 회사 생활로 아프고 괴롭기에, 아프고 괴로운 티가 얼굴로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친구들은 나를 보며 애써 좋은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 안색이 나쁘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심지어는 삭았다는 표현마저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 상처받지 않고, 도리어 위로를 받았던 까닭은 안색이 좋아서는 안 될 시간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 길이가 짧아졌으면 좋겠다. 집중력이 좋아졌으면 하고, 더는 크게 불안하고 싶지 않다. 전화 업무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안정된 삶을 살고 싶다. 산책으로 시작하여 감사하며 마무리하는 하루들을 바란다. 나는 나의 불만과 기대를 가만히 바라본다. 의사가 이 글을 본다면 뭐라고 얘기해 줄까. 아마도 이런 말을 들려주지 않을까. 


"몸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느낌, 감정, 감각을 외면하거나 소홀하게 대하지 마세요. 다정하게 바라보세요."


Image by Joshua Woroniecki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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