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근거림 Jul 13. 2023

상처 받았던 내가 상처 받은 나를 위로한다

"수호샘, 요즘 살 빠졌어요?"

"아이고, 이 사람 얼굴이 홀쭉해졌네"

"처음에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어디 아파 보여요"


상사와 동료들에게 최근 들었던 말이다. 탕비실을 오가며 만났던 이들이 안부를 물어왔다. 힘들다고 딱히 말한 적은 없지만 업무의 난이도와 양, 그로 인한 여파가 얼마 없던 살을 앗아갔다. 알리고 싶지 않았으나 드러난 고통의 흔적은 나를 관심이 필요한 직원으로 만들어버린 듯하다. 회사에서의 스트레스가 절망적인 수준까지 다다랐다. 무망감이 살아내려는 관성을 뒤흔든다. 어느 퇴근길, 달 가까이 솟은 아파트를 보며 '저기서 뛰어내리면 편안해질까?' 생각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도 10년이 지났다. 네 번의 이직을 하고, 새로운 직업도 얻었지만,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살아가며 재미를 그다지 느끼지 못한다. 이따금 즐거워하지만, 불안해하고 절망스러워하는 시간은 더욱 길다. '어차피 괴로워질 텐데 잠시 좋아하면 뭐 해?' 설레는 순간에 머무르려는 내게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과거에 상처받았던 '나'들이 전하는 물음이다. 그들의 의구심은 아팠던 이전 경험을 상기시킨다. 그때의 체험들은 흉터로 남아 수면 아래에서 거센 물살을 일으킨다. 살아내기에 급급한 나는 심해에서 일어나는 파동을 다만 놓치기 일쑤이다.


Image by Jiří Rotrekl from Pixabay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배가 아팠다. 그때는 바깥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는 게 어렵게 느껴졌다. 학교는 큰 일을 봤다는 사실이 친구들에게 알려지면 놀림받을 게 분명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화장실로 갔다. 그만큼 다급했다. 그날은 변기를 고치려는 아저씨가 두 명 있었다. 아저씨들에게 변기를 써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아직 안 된다고 했다. 다시 갔을 때도 비슷한 대답을 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교실 앞문이 열리더니 한 아저씨가 "자꾸 화장실 오는 놈 누구야!" 소리를 질렀다. 이어지던 그의 호통은 문이 부서질 듯 닫히는 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담임 선생님은 계시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바깥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기 시작한 것은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그러나 화장실 칸막이 문을 닫거나 열 때에 인기척이 들리면 크게 놀라고는 한다.


중학교 때는 친구들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게 중요했다. 공부에 대한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 않아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찾아주는 친구가 있으면 그 순간이 최고로 행복했다. 3학년이 되며 말수가 줄었다. 친구들은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말을 거는 일이 어렵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팔뚝을 이마에 대는 시간이 길어졌다. 부모님에게 울며 같은 반에 친구가 없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아이고, 어떡하지?" 당황해하는 아빠의 표정을 보았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감자탕집이 장사가 안 돼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졸업식 날, 엄마와 누나 그리고 이모가 학교로 왔다. 꽃다발을 들고 학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혼자서도, 가족들과도 함께 찍었다. "친구들이랑은 안 찍어?" 누나가 물었다. 나는 배가 고프다며 어서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졸랐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적응은 내게 중요한 과업이었다. 또래 관계에서 안정감을 찾는 일은 여전히 우선시되었다.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거나, 진로에 대한 고민은 크게 하지 않았다. 내게는 하루, 하루를 살아내는 게 절실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도태되지 않고, 나로서 어울리기를 바랐다. 편한 느낌을 받고 싶었다. 하루는 동기들끼리 가평 부근으로 놀러 갔다. 서로 알아가며 친해져 가는 그런 시기였다. 말할 기회가 그다지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하지 못한 까닭도 있지만, 친구들은 내게 먼저 묻지 않았다. 친밀감을 향하여 거침없이 다가서는 친구들을 제자리에서 헤엄치며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었다. 허전한 느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거리를 걷고, 걸었다.


"쟤 저러다 죽는 거 아니야?" 지나가던 나를 보며 다른 생활관 선임은 얘기했다. 이등병 시절, 낯빛이 어두워진 것으로 유명했다. 햇볕에 그을렸다기보다는 썩어가는 색에 가까웠다. 선임들은 수시로 괴롭혔다. 그들의 기대만큼 일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최선이었다. 학생 때는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어도 돌아갈 집을 생각하며 견딜 수 있었다. 군대에서는 교육이나 훈련이 끝나고 모인 집에서 갈굼이 시작된다. 선임들의 다그침이 잦고, 커질수록 실수는 늘어갔다. 대걸레를 빨다가 내 처지가 서글프게 느껴져서 눈물을 쏟기도 하고, 선임들이 모두 잠에 들었을 때 입을 틀어막고 울기도 했다. 그저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김수호 선임 복지사님, 생일 축하해요" 많은 후배들이 내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내심 뿌듯했다. 후배들의 말과 행동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마음에 닿았던 걸까. 예상치 못한, 성대한 축하를 받았다. 후배들 뿐만 아니라 동기나 상사들은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솔선수범 한다거나, 책임감이 강하다거나, 따뜻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주위로부터 인정받는 느낌이 들자 그들이 기대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원하거나 해낼 수 있는 몫보다 나서고, 책임을 지고, 인내하기 위해 애썼다. '김수호 선임 복지사'가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갈수록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힘들고, 두렵고, 괴로웠는데. 실망하게 될 까봐 드러낼 수는 없었다.


원형탈모가 생겼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엄마가 머리 뒤편을 보더니 "어머, 여기 구멍이 생겼네"라고 말했다. 손가락을 대어보니 머리카락이 있어야 할 곳에 맨들거리는 살이 만져졌다. 당시의 나를 괴롭게 했던 건 단 한 명의 상사였다. 그의 신경이 뜨겁고 날카로워질 때면 불려 갔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상사의 호통을 듣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 일보다 상사의 기분을 맞추는 행동에 몰두했다. 그를 만족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두면 되었을 텐데. 부모님에게도 그만두겠다고 말했었는데. 상사와의 관계가 안정되기만을 오직 바라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살아갔다. 


Image by StockSnap from Pixabay


회사 건물로 들어가기 전, 단 일 분이라도 명상을 한다. 호흡을 느끼며 마음과 만나기 위함이다. 신기하게도 다친 마음은 스스로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기도 한다. 짧은 호흡을, 뛰는 가슴을, 경직된 몸을 알아차리다 보면 미소가 지어진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로 갠 하늘이 추는 눈부신 춤을 감상하듯, 현실은 그대로이지만 그 현실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는 명상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진다.  


명상을 하다 보면 마음이 이미지로 떠오를 때가 있다. 외로울 때는 혼자 딱지를 치며 친구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고, 일상이 지겨울 때는 팔을 크게 휘저으며 앞으로 힘차게 걸어 나가는 유치원 때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채로 힘차게 돌아보며 해맑게 웃던, 유치원생 모습의 나는 되새길수록 울컥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하루는 웅크리고 있던 나를 감싸 안은 무리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군인, 직장인이 된 과거의 나였다. 보다 어린 나도 눈에 띄었다. 양팔을 벌려 고개를 가슴에 파묻은 현재의 나를 함께 안아주고 있었다. 한결같이 다정한 표정이다. 상처받았던 과거의 내가 상처받은 오늘의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바라보면 쓰려오는 상흔이 남아 있다. 그 상흔이 새겨진 경험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여전히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내 불안해한다. 


후유증을 간직한 저마다의 '나'가 아파하는 나를 알아준다. 안아준다. 괜찮을 거라고 말한다. 아프겠지만, 아플 수밖에 없겠지만, 괜찮아질 거라고 한다. 더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된다고 한다. 괴로우면 더 힘껏 괴롭다고 소리치라고 한다. 해낼 수 없는 일들조차 해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거라고 입모아 말한다.


그들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필요했던 말들만 골라하지 못했을 테다. 나는 한 때 누군가가 기적처럼 나타나 괴로움 속에서 헤매는 나를 구원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구원은커녕 아프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인정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내 마음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과거의 상처들을 마주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과거의 '나'들은 의구심 섞인 목소리가 아닌 애틋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픈 마음을 먼저 돌볼 수 있는 존재는 아파보았던 자기 자신이다. 나를 둘러싼 다정한 표정들이, 따스한 온기가, 부드러운 품들이 나를 쉬게 한다. 일순간에 떠오른 장면이었지만, 그 장면을 회상하며 글을 적고 있는 이 순간 내 호흡은 오롯이 평온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게 주어진 30분이라는 시간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