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근거림 Jun 11. 2023

내게 주어진 30분이라는 시간을

금요일마다 탄력근무를 하고 있다. 열두 시 반에 출근하여 아홉 시 반에 퇴근한다. 이 얘기를 꺼내면 주변 사람들은 불금을 회사에서 보낸다며 안타까워한다. 나는 만족하는 편이다. 한 주의 피로가 누적된 금요일에 늦게 출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늦잠을 자고 개운한 상태로 출근하는 길이 상쾌할 때가 많다.


열한 시가 되면 출근을 위해 집에서 출발한다. 고로 열한 시까지는 자유가 주어진다. 나는 이 시간에 늦잠을 자는 것뿐만 아니라 밀린 일을 처리하기도 한다. 집 청소를 하거나, 은행에 들르거나 하는 셈이다. 오늘은 차량 정비소에 다녀왔다. 스마트키의 전압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아침 아홉 시가 지난 한적한 거리는 금요일을 맞는 내 마음과 같았다. 급한 구석이 없었고, 쫓아야 할 대상도 보이지 않았다. 출근할 때면 사거리 신호에 맞추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 틈에 합류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간에는 그 누구도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신호가 깜빡거려도 개의치 않아 보였다. 나는 나의 마음과 외부의 상황을 동일시하며 오래간만에 느끼는 여유로움을 따사롭다고 생각했다. 


스마트키의 배터리를 가는 일은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점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서도 삼십 분 정도의 여유가 주어졌다. 아침부터 사십 분 가까이 걸었더니 피로가 느껴졌다. 요즘에 운동을 좀처럼 안 하다 보니 장딴지가 저린 느낌마저 들었다. 낮잠을 자기에는 짧고, 다른 무언가를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모처럼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무언가 결심이 서는 순간부터는 걸음이 빨라지기 마련이다. 행동으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유로운 나는 빨라지는 걸음을 인식하며 호흡을 조절했다. 숨을 고르니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하고 싶다'는 마음을 확인하며 오늘 쓰고자 하는 글의 주제를 결정했다.





"선생님,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아, 그런데 제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릴게요. 천천히 다녀오세요."

 

망설이다가 이내 결심한 말을 꺼내기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우리 센터에서 근무하는 상담사 선생님이 나와의 짧은 대화를 끝으로 바로 가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선생님이 화장실에 가 있는 동안 통유리 바깥으로 내다보이는 낮을 바라보았다. 고요해 보였다. 사람들이 수시로 움직이고 차들이 오갔지만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쨍한 불빛 아래에 소음들이 수시로 범람하는 사무실과는 사뭇 달랐다. 가만히 서서 동네를 바라보는 일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 사이 어렵게 결심한 말을 선생님에게 꺼내지 않기로 했다. 바빠 보이는 선생님에게 할 얘기는 아닌 듯싶었다. "선생님, 하실 말씀이 무엇이지요?" 다정하게 묻는 선생님께 "아니에요. 다음에 말씀드릴게요"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정말 괜찮은지 여러 번 묻고는 다시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퇴근했다.


내가 선생님에게 묻고 싶었던 것은 '어떤 음악을 좋아하세요?'였다. 상담을 준비하던 선생님이 반주를 듣고 있는 걸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멜로디가 이상하게도 근무하는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호기심이 생겼다. '선생님은 어떤 음악을 좋아하실까?', '선생님은 평소 무엇을 하며 휴식을 취할까?', '선생님은 어떠한 삶을 살아오셨을까?' 하며 끝을 모르는 호기심은 계속해서 달려갔다. 


선생님이 사라진 복도를 따라 사무실로 돌아오던 나는 허전함을 느꼈다. 그 허전함은 한 겨울, 동네 친구들이 나와주기를 기대하며 혼자 딱지를 세게 내리치던 어느 순간의 느낌과 비슷했다. 선생님에 대해 더 알지 못해서 허전했던 게 아니라 마음을 나눌 곳이 없다고 느껴져서 허전했다. 팽이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정신을 놓을라치면 빳빳한 줄이 팽이의 심을 예리하게 치는 일터에서 지쳐있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


기댈 곳이 필요했다. 지난 12월, 이 회사에 들어와서 겪었던 많은 일들을 털어놓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하기에는 조심스러웠다. 어디까지 말하는 게 안전한지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듯, 바람이 불듯, 새가 울듯 자연스럽게 꺼내 보일 수 없는 마음으로 외로웠다. 줄곧 웃으며 만족한 듯 살아갔지만, 세상에 나만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경치를 핑계 삼아 무거운 눈물을 흘렸다.


순수한 관심으로부터 다정히 나의 하루를 물어봐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추면 편히 얘기해 보라는 듯 미소 짓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힘들다는 말만 입에 달고 살뿐, 무엇이 힘든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내게 위로해 주는 존재에 대한 기대는 환상에 가깝다. 마음은 표현해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또한 한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아야 우리는 그에 맞게 반응할 수 있다. 만약 위로를 바랐다면 위로받고 싶은 대상에게 기꺼이 말문을 열었어야 했다. 


나는 나의 마음을 가만히 안아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무릎을 꿇고 두 팔을 크게 벌려 굳어가는 마음을 감싸 안는다. 은은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을 마음에 기대어 "괜찮아"라고 말한다. 숨을 들이쉬고 내시며 다시 "괜찮아"라고 말한다. 나에게 밖에 고백하지 못한, 나만 알고 있는 순간의 아픔들을 알아주려고 애쓴다.

 

꿈을 꾼다. 누군가의 손이 나의 등을 쓰다듬듯 토닥여주기를. 위축된 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아주기를. 그런 존재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기를. 그런 순간이 내게 찾아오기를. 


Image by Amaya Eguizábal from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으로 이어진 곳에 행복이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