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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Jul 29. 2023

더 알아 줄 것을, 크게 안아줄 것을

"이미 지쳐서 쉬어도 체력이 회복되지 않아요"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건 어때요?"

"....."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다. 상사는 내가 직면한 어려움을 해결해주고자 했다. 무엇이 어려웠는지 물었다. 수시로 발생하는 불안정한 상황들이 힘들었다고 했다. 이를 테면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와 가볍지 않은 사람들의 사연, 나와의 대화에서 즉시 해결할 수 있는 고민들은 드물었고 상담으로 이어져야 하는 저마다의 중대한 아픔들이 나를 괴롭게 했다.


업무에 전념하기 위해 노력했다.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이라면, 좋아하는 것이라도 줄였다. 글도 자주 쓰지 않았다. 글을 완성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이 생각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걷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출, 퇴근 때 이동하며 걷는 게 전부였고, 편의점 빵이나 컵밥이 주식이었다. 아낀 만큼 늘어난 체력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돕기 위해 애썼지만 이내 밑천이 드러나고 한계에 직면하게 됐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부족하게만 느껴져요"

"우리가 하루 동안 할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요. 스스로에게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우리는 한계가 있는, 어쩌면 분명한 사람일지도 몰라요"


전 직장에서 후배에게 해야 할 일이 많다며 투정을 부릴 때였다. 후배는 '한계'에 대해 말해주었다. 우리는 개인으로 보면 우주와 같은 존재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주연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우주의 관점으로 보면 티끌만큼 작은 존재이다. 높은 빌딩에서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을 보면 먼지처럼 작아 보인다. 길을 걷는 우리가 발밑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지나가는 개미를 발견하기 어렵다. 개인으로 보자면 우리는 전체이자 커다란 존재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그저 작고 연약한 존재이다. 


나는 또 한 번 회사에서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힘이 든다고, 일을 해내기 버겁다는 마음을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했다. 이따금 다른 업무를 하는 동료들에게 말했지만, 그들도 자신들의 우주를 살아가느라 누군가를 돌볼 여유는 없어 보였다. 만약, 근무 상황이 나아지기를 바랐다면 상사에게 말했어야 했다. 내가 직면한 업무상의 어려움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하지만 일에서 경험하는 모든 어려움을 스스로 끌어 안기로 나는 결심했었다. 


Image by Jill Wellington from Pixabay


서투른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욕구가 큰 편이다.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늘 앞선다. 특히 잘 보이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거나, 흠집을 잡히기 싫은 대상이 있을 때 잘 해내고 싶은 갈망은 강해진다. 과거 한 직장에서 만났던 동료 C는 나를 더 잘 해내도록 촉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민한 성격이었다. 언어에 특히 민감했다. 대화를 하다가 무심코 쓴 단어에 추궁하듯 물어보는 그의 방식은 나를 더욱 신중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거 반대인데, 왜 이렇게 했어요?"


그가 이따금 예상치 못하게 마음으로 불쑥 침범하면 당황하고는 했다. 그리되면 대화의 초점이 되어야 할 문제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그를 돌변하게 한 표현에 초점을 맞춰 해명하기에 급급했다. 그가 집요하게 파고들수록 나의 목소리는 작아지고, 떨렸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분노였다. 화가 났다. 나라는 사람을 전체로 보지 않는 그가 미웠다. 내가 하나의 원이라면 내가 쓰는 단어는 점에 불과하다. 언어는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수단이지만, 적확하게 전달하기는 어렵다. 입에서 튀어나오거나, 튀어나오려는 모든 말에 주의와 의식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하지만 화는 이내 스스로를 향했다. '왜 더 신중하지 못했을까?' 동료의 말이 길어질수록 부족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 것만 같아 사라지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하루는 화가 난 나를 인식하고 호흡하니 화 안에서 발갛게 달아오른 내가 보였다. 수치심이었다. 수치스러웠다. 잘 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주어진 일도 끄떡없이 해내고, 주변으로부터 뭐든 잘한다는 인정도 받고 싶었다. 하지만 이따금 듣게 되는 동료의 언성과 주늑이 드는 상황은 그 무엇도 해내지 못할, 보잘것없는 사람처럼 만들었다.


수치심은 어릴 때부터 나를 따라다녔던 감정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러 감정을 골고루 느낀다. 우울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수치심도 그중 하나인, 보편적인 감정이다.  


"수호샘은 방귀 튼 적 있어요?"

"바... 방귀요? 아니요..."

"아직도요?"


회사에서 점심을 먹다가 우연히 방귀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동료들은 자신들이 방귀를 튼 역사적인 경험을 들려주었다. 누군가는 남편에게 직접 맡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방귀를 뀌는 게 쉽지는 않지만, 낄 수 있는 대상이 편안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방귀를 시원하게 뀔 수 있는 대상이 있는지 내게 물어보았다. 부모님밖에 없다고 했다. 동료들은 기겁을 했다. '연애도 오래 했고, 나이가 서른을 넘겼는데, 아직 그 누구에게도 방귀를 터 본 적이 없다니..'와 같은 표정과 탄식이었다.


방귀는 내게 민낯과도 같다. 괜찮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내게 방귀는 치명적인 결점과도 같다. 어딘지 모르게 더럽고, 불쾌하게 느껴진다. 방귀를 참는 건 인위적인 행동이다. 체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방귀는 복부와 항문을 자극한다. 그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는 일정한 긴장과 힘이 필요하다. 참을수록 뱃속에서 요동친다. 방귀를 뀌는 걸 견딜 수는 있어도 방귀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끼어야만 한다. 부인하고, 억누를수록 복부에 통증을 주며, 주의가 분산된다. 방귀는 뀌다와 만났을 때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된 형태를 띤다.


잘 해낼 때도 있었다. 외부의 긍정적인 반응으로 더욱 동력을 받았다. 더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외부로 눈을 돌릴수록 만족을 느끼기 어려웠다. 보다 자주, 보다 큰 반응을 기대하며 해낼 수 있는 이상의 노력을 기울였다. 체력이 고갈되기에 적합한 순환의 고리였다. 한 때는 전화 응대를 잘하고, 상담사에게 적절히 배정하는 스스로가 대견했다. 동료나 상사의 칭찬도 들었다. 상담사들도 좋아하는 듯했다. 나와 통화하는 고객들도 고마워했다. 목소리가 부드럽고 친절하다는 얘기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돌이켜보면 수치심을 느끼기 싫어서 창문을 닫는 작은 일이라도 다만 광인처럼 집착했다. 창틈이 열려 퇴근 후 사무실로 바람이 들어올 수도 있는데, 그 바람 자체에 대한 걱정보다는 상사들이 창문도 제대로 닫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를 생각할까 봐 걱정했다.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바람이 샐 수도 있는데, 꽉 잠근 수도꼭지라도 물 한두 방울쯤 떨어질 수도 있는데 그마저도 일을 못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두려워했다. 


참았던 방귀를 뀔 때 우리는 비로소 편안함을 느낀다. 고통이 사라진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일터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억누르고 외면했던 마음과 만나면 처음에는 고통스럽다가 이내 평온해진다.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만큼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정을 그 순간에 그대로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필요한 선택을 할 수 있다. 감정에 따른 행동을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다. 마음을 거부할수록 고통은 커진다. 마음은 어쩌면 알아준다와 만났을 때 완성되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상담에서 쉼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무언가로 나는 설명했다. 만약 쉬는 게 어렵다면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고 했다. 걷기와 글쓰기가 문득 생각났다. 글쓰기야 가끔 했지만, 언제 마지막으로 걸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대화의 말미에 어쩌면 코드를 뽑아서라도 쉬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나는 말했다. 해야 할 일과 그로 인한 생각으로 과열되면 휴식을 취하기 어렵다. 휴식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활동에 몰두하며, 살아있는 이 순간을 그대로 느끼며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 그에게도, 내게도 필요했다, 


오늘은 조금 걸어볼까 한다. 날이 무척 덥다고 하는데. 내 마음도 제법 후끈하니 누가 더 더울지는 겨뤄보고 싶다. 땀을 흘리고 나면 기분도 나아지지 않을까. 자기 안에 갇혀 스스로를 분주하게 살아가도록 만든 나를, 수치스러운 감정이 싫고, 잘 해내고만 싶었던 나를 더 가까이서 마주하고 싶다. 햇볕 아래에서, 늘어선 그림자를 데리고 한 걸음씩 걸어보아야겠다. 이내 무더위 아래에서 한계를 느낄 테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지만, 서둘러 그늘로 피신하여 '괜히 나왔다'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아무렴 어때. 그게 나인걸.


Image by Jill Wellingto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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