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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Feb 12. 2024

슬프니까, 우선 음악부터 한 곡 들어야겠다

"제가 지난 주말에 서울숲을 다녀왔거든요."

동료 C는 말했다.

"겨울이라 푸릇한 느낌이 덜 할 것 같은데, 그런대로 좋더라고요."

"오.. 좋았을 것 같아요."

자연을 좋아하는 나는 포근했을 그의 콧바람이 그저 부러웠다.

"거기서 고양이를 보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저 같아 보이기도 했어요."

고양이에 이입한 그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묻지 않았기에 알 수는 없으나, 그의 말을 이었다.

"오, 저는 예전에 바닥을 보면서 걷다가 껌딱지를 보고 슬펐던 적 있어요."

화자는 나로 슬그머니 바뀌었고, C와 상사 B는 나의 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위의 대화는 나의 평소 방식과 사뭇 다르다. 나라면 C가 언제, 어떤 계기로 서울숲에 갔는지 먼저 물었을 것이다. 그곳의 풍경은 어땠는지 감상하며 들었을 것이고, 필요하면 두 눈을 잠시 감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털색의 고양이를 만났으며, 그로부터 자신의 무엇과 마주 했는지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하지만 껌딱지를 보며 글썽였던 그때처럼, 슬픔이라는 감정이 차고 넘치는 요즈음, 대화의 순간에 집중하며 원하는 형태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능력을 내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튜브에 올라 파도에 몸을 그대로 맡겼을 때처럼, 일어나는 상황들을 적절히 구분하여 판단하지 못하고 주어지는 대로 끌려다니고 있다. 바다와 나 사이의 공기가 물살에 저항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듯, 슬픔에 잠긴 나는 존재감을 잃고 자극의 더미에서 표류하고 있다.


끝내지 못한 일들이 쌓여가고 있다. 새로운 일들이 또한 시작되며 끝과 시작이 모호하게 뒤엉키고 있다. 내가 스스로 업무를 통제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날의 가장 급한 일부터 시급히 처리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나는 주말이 되면 무기력감을 동반한 슬픔에 젖어든다. 지나가던 사람의 웃음소리도 이상하리만치 슬프게 들리고, 뚜껑을 타고 흐르는 아메리카노 한 줄도, 연휴를 맞이하여 오늘까지 쉴 수 있는 이 순간에도 나는 슬프다고 느낀다.


슬픔에 대처하는 나의 방식은 자극 회피이다. 겪어야 하는 일상의 경험들을 과제로 인식하며 피한다. 슬퍼질수록 별안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아니하지 못하게 된다. 방에는 창고처럼 물건들이 하나씩 쌓여가고, 만기가 된 예금보험은 한 달째 찾지 않으며, 받은 지 보름이 지난 택배는 거실 한편에 그대로 놓여있다.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하지 못하고, 마땅히 외출도 하지 못하며, 내키지 않을 때조차 드라마를 보며 방 안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불쾌한 감정이 쌓여가는 휴일 이 순간을 쉬고 있다고 표현하긴 어렵다.


"저는 행복이 거창한 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거창할수록, 현실과 거리가 멀수록 불행해지니까요"

함께 야근하던 동료 D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이 날의 주제는 행복이었다. 자신의 삶에 몰두하는 편인 D는 사회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보다 무게를 둘 수 있는 동료이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행복은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해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아주 작은 선택이라도 그 선택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행복을 결정하는 중요한 키인 것 같아요."


그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잠잠히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일상에서 나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극들을 경험해 갔을까. 최근의 나는 회사의 지시에, 판단에, 나로부터 시작한 열등감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일을 원만히 끝마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며, 웃으며 대꾸했었는데. 속으로는 어이가 없거나 짜증이 나도 기꺼이 수락했었는데. 보란 듯이 노력했었는데.


괜찮지 않았었다는 것을 이내 깨닫는다. 나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만약 '나'가 중심이 되어 선택했다면 회사가 부당한 지시를 내려도 거부하거나, 거부하지 못하더라도 내면에서 느껴지는 불쾌함을 알아주었을 것이다. 안간힘을 쓰며 지키던 평안을 모두 불태울 것처럼 타오르던 분노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며, 커가는 불씨보다는 불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불이 나야 했던 마음을 먼저 보듬었을 것이다.


휴일을 하루 남겨둔 '나'이지만, 나를 위한 활동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지만, 침대에 누워 반전을 상상하는 내가 이상하지 않게 느껴진다. '밖으로 나가 자극을 감당할 기운이 없구나', '그래, 힘들만한 일들이 요즘 너무 많았지', '과하게 애쓴 만큼, 내게는 지금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일 거야'. 슬픔을 슬픔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슬픔이 일으키는 해일에 허우적대기보다, 나만의 사정을 살펴보니 마음이 몽글해진다.


"행복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래서 미세하리만치 작은 것이라도 나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그 선택으로 어떤 결과가 주어지더라도, 저의 온전한 의지로 내린 선택이라면 저는 감당할 수 있거든요."

이 순간, 지친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날 선 상태로 사람과 일을 대하고 처리하던 내게, 나에게는 슬픈 마음을 그대로 마주하며 알아주는, '그래, 슬플 수밖에 없었구나' 하며 스스로 돌보는 시간이 시급하게 필요했으므로, 창밖 세상을 가만히 내다보며 '바다가 들린다'의 연주곡을 우선 들어야겠다.


가만히, 가만히.

더 길게, 더 가뿐히.

괜찮을 때까지, 괜찮아질 때까지.

이대로, 이대로.


Image by Joe from Pixabay


바다가 들린다 (Ocean Waves, 海がきこえる) | Ocean Waves | 피아노 커버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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