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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비에 내 몸 적시면, 새하얀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있다면, 기꺼이 내어 드릴 텐데. 온 세상 떠나갈 것처럼 처절하게, 처연하게 내리었으면 하는 바람과 다르게, 말 없는 구름은 그저 울먹거리고만 있다. 기도한다. 바라건대, 바라옵건대 아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러나 구원을 바라는 나의 절실함이 부족했던 탓일까. 하늘은 밤새도록 묵묵부답이었다. 원망 어린 시선을 거둔 나는 잠을 이내 청하기로 했다. 나아지리라, 나아지리라. 나의 내일은 비가 그친 후의 화창한 날씨처럼, 평온하기를.
장마가 이어지는 요즘은 들떴던 기분마저 쉬이 울적해지기 일쑤이다. 즐거울 만한 일들을 떠올리려 해도, 퇴사에 대한 고민이나 하고 있는 나날엔 우중충한 상황들만 펼쳐지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하필이면'이란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차라리 몰랐으면 어땠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모르고, 내가 잘 하는 것을 모르고, 내가 사랑하는 것을 모르고, 내가 즐거워하는 것을 몰랐다면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아니다. 이는 명백한 망상이다. 나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은 무시한 채, 완성된 모습이 되어 있기만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생각만 많을 뿐, 제대로 끝을 본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늘 그랬다. 달콤한 제철 과일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노력'이란 숭고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건만, 소정의 돈만 있으면 잘 익은 제철 과일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었으니. 돌이켜보면 나는 내 인생의 주체가 아닌 소비자로서 편하게, 요령껏 결과물을 얻으려고만 했다. 맞다. 과정을 생략한 나에게 좋은 결과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나의 탓으로만 치부하고 싶진 않다. 무언가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에 있다 하더라도, 그 과정이 사회적인 통념이나 누군가의 바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현실과 내면 사이의 괴리감에 빠질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말했다.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저렇게 행동해야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고. 나는 그것이 정답인양 떠받들며 지내왔다. 그러나 세상은 매 시간 변하고 있고, 성공을 논하던 기준 또한 고정적이지 못했다. 성공을 위해 옳다고 믿었던 행동들이 나의 내면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강요한다면, 물질적인 풍요로움이나 직위가 갖는 명성으로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남부럽지 않게 성공했다고.
명확한 기준이 없는 삶 속에서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틈에 정체되어 있는 건 아닐까? 혹은, 한없이 물러서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삶이 이토록 모진 과정인 줄 진즉에 알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물어본들, 돌아오는 건 공허한 마음을 두드리는 엔진 소리와 흐릿한 창 밖 풍경뿐이다. 지쳐버린 걸까. 아니면, 나의 모습이 원래 이러했던 걸까. 이상하게도 선뜻 분간이 되질 않는다.
뜬구름이라도 힘껏 뛰어올라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자신감에 투박한 못질을 시작한다. '아무것도 못하는 놈' , '네가 그렇지 뭐' , '그럴 줄 알았어' 같은 조롱과 멸시 가득한 눈빛들을 생각하며, 망치는 더욱 거센 힘을 발휘한다. 한 번 박힌 못은 두 번 다시 제거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나는 오늘 새로운 못 하나를 두드린다. 남아있는 '나'란 존재를 모두 불태울 것처럼.
오늘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곧이어 내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겠지. 매일을 지나가기만 바란다면 살아가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되물어본들, 하늘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나약해지려는 마음에 맞서 긍정적인 것들을 생각해보았다. 나에게 있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살아가는 이유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나,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는 함께 살아가며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내가 '나'일 수 있게 품어준다. 둘, 나를 믿어주는 여자친구가 있다. 내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든, 그 생각이 당장은 이해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울지라도 신뢰하는 눈빛을 보내며 말없이 받아주고, 기다려준다. 셋, 우정을 나눈 친구들이 있다. 활발했던 과거와는 달리 어눌하고 말수가 적어졌음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결같이 '나'로써 대해준다. 넷,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느 장소에서든 좋아하는 노래에 의지해 걸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다섯,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이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나의 글이 누군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긴 어렵겠지만, 일상의 고단함을 잊고 잠시 쉬어가는 그늘이 될 수 있다면. 굳이 하늘에 의지하지 않아도 자부할 수 있다. 성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노라고. 누군가에겐 별 볼일 없을지언정, 나에겐 살아가는 이유 그 자체이니까.
바라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바라는가. 곰곰이 생각해보자. 혹여 그것이 사회적인 통념이나 누군가의 바람은 아닐지 가려내며. 다소 겁날지라도 인생이란 짧은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직접 써내려 가자.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의 이야기를.
나는 더 이상 아상에 빠져 현실을 등한시하거나 외면하지 않겠다. 찬란했던 과거와 막연한 상상으로 펼쳐진 미래는 현재의 나를 부정하게 만들고, 병들게 한다. 커다란 밑그림만을 그려놓은 채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하자. 천천히 그리고 올곧게. 지금 이 순간만을 기대하며, 두근거리는 마음과 함께.
오늘로써 스물아홉의 생일을 맞았다. 시간은 어찌 이리 빠르게만 흘러가는지, 거뭇했던 머리에 새치가 늘어가는 요즘. 나도 제법 어른이 되어가고 있나 보다. 첫 퇴사를 한 지 거진 1년이 지났고, 그 과정을 되돌아보니 여전히 방향을 잡지 못해 고민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비록, 현실의 일들이 고되고 힘들지라도 꿋꿋이 이겨내고자 한다. 나에겐 살아가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도 언젠가는 추억이 되겠지. 그 날을 기약하며, 나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 내일이 없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겠다.
마지막으로 최근 댓글에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란 인사말을 자주 사용했었다. 맞다. 글을 잘 쓰는 누군가에 비해 부족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이 마음에 드는 글이 완성될 때까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나에 대한 배려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일관성 없는 나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며,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다른 인사말을 남겨보고자 한다.
"저에게 있어 소중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