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자 남겨진 시간이면 스스로에게 묻고는 한다. '과거 나의 선택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앞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까?'라고. 좋은 미래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 또한 과거를 돌아볼 때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여야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어느 깊이까지 내면을 들여다봐야 적당하다고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작은 선택에도 선천적인 기질, 자라온 환경, 경험, 관계와 같은 여러 요인들이 작용한다. 예를 들어, 과자가 먹고 싶을 때 나는 필요한 만큼만 구입한다. 주로 1개이다. 여러 과자들을 눈여겨보다가 늘 먹던 과자를 고른다. 안 먹어 본 과자를 시도했다가 실패할 확률이 있기 때문이다. “너는 또 그 과자를 먹니” 라는 어머니의 말씀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겁이 나니까.
사실, 나는 시도하는 걸 좋아한다. 새로운 동네를 걸어서 구경하는 걸 특히 즐거워한다. 아는 사람이나 가게가 없을지라도 걸으며 그 동네를 눈에 담아가는 과정은 가뿐하고 설렌다. 걸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낯선 장소에 대한 두려움 보다 앞선다. 하지만 나는 대체로 시도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나는 '배려'라는 의미에 대해 작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 소심한 성격 탓에 친구들과 친해질 방법을 고민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친구에게 도움을 주다 보면 자연스레 친해지지 않을까?'하는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이 생각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지난날들은 온전한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한 나로 만들어버렸다.
어느덧 성인이 되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라고 받아들였던 나의 배려는, 준만큼 되받기를 바라는 기대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의 내 선택에는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뒷전이었다, 나는. 선택은 꼬이기 시작했고, 나를 위한 선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최근에 비로소 깨달았다. 법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나는 그 무엇도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 그동안 '나'로서 살지 못했던 과거가 후회되지만, 늦은 시기란 없다. 더 늦은 시기만 있을 뿐이니까. 비록 지난날들을 떠올리면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오지만, 그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중요한 건 간절히 원했던 그 무언가가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삶은 기나긴 여정이다. 하지만 남들을 살피며 우물쭈물 하기에는 짧은 여정이다. 긴 터널을 빠져나올 때를 떠올려보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새하얀 빛이며, 그 너머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터널을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심려치 말고 스스로를 믿되, 문득 지금의 삶이 내가 원하는 방향인지 헷갈릴 때면 가끔씩, 걸어왔던 길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묻자.
더 이상 인생의 답을 억지로 찾기 위해 스스로를 추궁하지 않을 생각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도, 미래에 대한 막연함으로 몸서리치는 시간은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순간을 살아갈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