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 축구 게임을 같이 하던 시절도 초등학생 때 막을 내렸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부모님을 따라다니지 않으려고 했다. 아빠만 보면 감정이 앞섰다. 말투는 신경 쓰였고, 얼굴은 쳐다보기 싫었다. 특히, 아빠에게서 나는 쩝쩝거리는 소리가 밥 먹는 시간을 미룰 만큼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아빠에 대한 이유 모를 불편감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나는 아빠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으려 했고, 아빠는 생계를 유지하는 데 몰두했으므로, 우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방향으로 평행을 그리며 나아갔다.
게임 속 풍경에 머무르던 내가 자연을 좋아하게 되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서울 곳곳을 걷다 보니 일상의 경관이 주는 아름다움에 매료된 게 틀림없다. 첫 직장에 입사하고 경험한 고통은 그간 겪었던 통증과 차원이 달랐다. 회사에는 조직이 있었고, 업무가 있었으며, 근로계약서가 있었다. 상사나 후배들과의 관계, 낯설고 어렵기만 한 일, 급여를 받는 직원이라는 신분은 학생 때와는 다르게 커다란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내가 학생일 때는 회피하는 성향이 두드러졌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면 걱정하던 일은 대체로 생기지 않았다. 샤워기를 켜고 울다가, 이불을 덮고 울다가, 길에서 울다가 일상으로 돌아가면 괜찮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직장인이 되면서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예상하는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면서 본격적으로 두려워한 시기도 처음으로 직장에 입사한 시기와 일치한다.
첫 회사에는 모금을 주 업무로 하는 팀들이 있었다. 회사는 팀 단위로 일, 주, 월, 반기별 실적을 계산하도록 했다. 각 팀은 회의 때마다 실적을 발표했다. 선임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르내리는 팀별 수치와 미묘하게 바뀌는 동료들의 표정이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내가 입사한 회사에서 모금 업무를 위해 길거리로 매일 나가게 될 줄은 몰랐다. 면접 때 설명은 들었지만, 비가 내리면 지하보도라도 들어가 책상을 펴야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후원해 달라'는 요청을 듣고 부스로 다가오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거리모금에 대한 사람들의 피로도가 쌓이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의 동선을 피해서, 대화하는 사람들을 지나쳐서, 눈을 맞추는 몇몇 사람에게 후원을 나직이 말하며 부스로 안내했다.
도로에는 차들이 수시로 오갔다. 도보는 인파로 북적였다. 나는 부스로 온 사람에게 후원해 달라고 했다. 오천 원보다 적어도 후원할 수 있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이 사람을 설득하지 못하면, 후원을 받아내지 못하면 눈을 맞춰 주는 한 사람을 찾아 또다시 방황해야 했다. 모금을 하는 회사의 명분은 있었지만, 모금 업무를 위한 나의 명분은 없었다. 장애 아동이 노후화된 생활 시설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안락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후원해 달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모금 업무를 그만하고 싶었다.
경력이 쌓일수록 후배는 늘어갔다. 팀의 실적을 책임지는 자리까지 올랐다. 모금할 장소를 결정하고, 팀원을 챙기고, 후원을 요청하고,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능력까지 요구됐다. 내가 못하면, 못해내면 팀의 실적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업무에 대한 압박감이 쌓여갔다. 불안했다. 출근하는 길조차 공포감에 휩싸이게 했다. 시민들의 눈을 피하고 싶었다. 후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일을 멈추고 싶었다. 후배들을 독려해야 하는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른 팀과 경쟁해야 하는 위치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좋은 선임처럼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치워버리고 싶었다.
첫 회사에는 가깝게 지내던 동기들이 있었다. 그것도 여섯 명이나. 그러나, 고민을 뚜렷하게 얘기해 본 적은 없었다. 내 안에서만 시끄러웠다. 늘 그랬다. 내가 이토록 힘들다고, 괴롭다고,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말해야 하는 이유를 몰랐다. 말하고 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전에 없던 경우를 경험하면서도, 혼자 감당하거나 회사에서 사라지는 방법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걸었다. 어느 때고 걸었다. 어쩌면 배회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야근을 하든, 약속이 있든, 밥을 못 먹었든 개의치 않았다. 걸어야 했다. 신기했다. 숨이 차고, 다리 근육이 땅겨오고, 몸에 열이 오르면 해소되는 기분이 뒤따랐다. 나는 친구들과 만나거나,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겨도 거절하려고 했다. 걷는 순간이 솟구치려는 마음을 달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걸어야만 요동치는 마음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으니까.
이직한 회사에서 다시 퇴사할 때까지 걷기는 계속됐다. 홍제천을 걷고, 남산을 오르고, 경춘선 숲길을 지났다. 대학원에 진학한다는 이유로 두 번째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핑계에 불과했다. 야간대학원이었으므로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에서 감정기복이 큰 상사로부터 경험한 일 년의 시간을, 그가 퇴사하고 이 년이 지난 시점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목을 풀 때 내는 '크흠' 하는 소리조차 마음으로 뿌리내리어 자리 잡은 듯했다. 상사를 연상시키는 조건을 가진 사람이 지나가면 스치는 뒷모습에도, 목소리에도, 냄새에도 몸이 굳고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회사라는 환경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나에게 주어지는 의무와 역할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월급을 받든 못 받든, 경력이 단절되든 말든 상관없었다. 직원으로 사는 시간은 숨을 옥죄였고, 나는 단지 살고 싶었다.
또다시 백수가 되었다. 대학원 수업이나 과제가 없을 때는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집 주변으로 등산로가 있다. 사는 지역이 서대문구다 보니 북한산과 가깝다. 인왕산도 있다. 나는 산을 자주 찾았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신경 쓰지 않았다. 산의 묘미는 오를 때나 내릴 때, 경치를 감상하며 사색에 빠지는 순간에 있었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함께 숨을 쉬며, 배경으로 머무는 찰나와 같은 시간이 산을 찾도록 만들었다.
아빠는 원체 등산을 좋아했다고 한다. 아빠가 한창 젊을 때는, 그래봐야 서른 정도이지만, 출근하기 전에 등산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만큼 걷는 걸 좋아하고, 풍경을 감상하는 걸 좋아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아빠가 내 나이대에 등산을 즐겼다는 이야기를 아빠와 등산을 같이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듣게 되었다. 아빠와 나는 주말마다 산에 올랐다. 북한산 비봉이나 대남문에 오르기도 했고, 인왕산 정상을 찍거나, 예약해야 입장할 수 있는 둘레길을 찾아가기도 했다.
아빠에게 등산화를 빌리면서부터 등산을 함께 다니게 되었다. 둘레길처럼 인공적으로 조성된 길을 걸을 때는 운동화를 신어도 괜찮았다. 반면, 흙과 돌로 이루어진 산길에서는 마찰력이 부족하여 넘어질 뻔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낙엽이 쌓인 구간을 지나갈 때는 엉덩 방아를 찧기도 했다. 아빠는 주말마다 산에 오르는 것 같았다. 자영업을 그만두고 되찾은 주말에 다녀오는 듯했다. 우리 집 신발장은 아빠의 등산화로 가득 차 있었다. 아빠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신발장을 열어보면 등산을 좋아한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정도이다. 나는 다만 신발장에 놓인 나의 신발들을 보며 추억했고, 언젠가는 버려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하지 못했지만.
아빠에게 등산화를 빌려달라고 말했다. 아빠는 흔쾌히 가진 등산화를 내어주었다. 발목 아래로 내려오는 가벼운 등산화였다. 등산화를 한두 번 빌려 신다가 이번에는 등산복을 빌려달라고 말했다. 아빠는 가지고 있던 바람막이며, 바지며, 양말이며 모두 내어주었다. 자연스레 산은 어디로 다녀올 건지, 어디를 다녀봤는지, 어떻게 오를 것인지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등산을 같이 갈 친구가 없었던 나는 머뭇거리며 아빠에게 묻게 되었다.
"같이, 등산 가실래요?"
아빠와 산에 오르기로 약속한 것까지는 좋았다. 목표한 산의 도입부에 이르러 각오를 다지는 순간까지도 괜찮았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아빠에게 나에 관하여 얘기하려고 할 때면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입안이 까끌까끌해지고 속이 부대꼈다. 그러는 사이, 아빠가 대화를 먼저 시작했다. 서로의 호흡이 가팔라지던 시점마다 아빠는 살아가고 있고, 살아온 자신의 삶과 역사에 대해 들려주었다.
아빠의 얘기만 일방적으로 듣는 일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빠는 내 얘기는 안 궁금할까?' 의문이 들었다. 등산을 거듭할수록, 나란히 찍은 발자국이 쌓일수록 아빠는 묻기 시작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회사 생활은 어땠는지. 아빠가 물어보는 방식이 마치 오늘 학교에서 급식으로 뭘 먹었는지, 친구와는 어땠는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아빠의 질문은 어딘지 서툴렀고,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의 근황에 대해 의식적으로 아빠에게 대답해 보기 시작했다.
아빠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못했다. 내가 하는 말에서 판단을 하거나, 조언을 하거나, 자신의 이야기로 돌려주기도 했다. 아빠에게는 포장지만 보여주었을 뿐인데, 마음에는 깊고 거센 순간들이 담겨 있는데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글쓰기와 상담 공부로 나에 대해 알게 된 부분이 있었고, 아빠와 대화하며 아빠의 역사와 배경, 성향, 대처 방식, 가치관에 대해 일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빠는 내가 안전하기를 바랐으며, 고생을 모르게 하고 싶었으며, 자녀에게 다정하게 다가서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며, 소중하니까. 사랑하니까 쉽게 다가오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아빠에게 느꼈던 짜증은 아빠가 나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에 대한 불만족감도 있었겠지만,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무의식은 알아서, 짜증을 내도 받아줄 거라는 걸 알아서, 곁에 있어줄 거라는 걸 믿어서 부린 투정에 가까웠다.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만 다가오지 못했고, 나는 살아가며 경험한 온갖 불만족스러운 감정들을 아빠를 통해 느끼고, 표현했다. 하지만 아빠와 내가 서로 다가가고, 내가 아빠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며 나에게 무관심한 듯한, 나와 엄마에게 이따금 불처럼 화를 내던, 젊은 모습으로 살아 숨 쉬던 내면의 아빠와 화해할 수 있었다.
아빠와 나의 관계는 최근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아빠는 칠순을 앞두고 있다. 엄마는 작년에 먼저 칠순을 맞았고 친척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다. 연달아 식당을 대관하고 친척들까지 대접하며 축하받기에는 부담이 따라 아빠에게 갖고 싶은 선물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속으로 '신발도 많고, 옷도 많고, 스마트 워치도 몇 해 전에 사드렸고, 핸드폰도 최근에 바꾸셨으니 뭐 괜찮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는 의외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손주"
마흔을 앞둔 아들의 넥슬라이스가 아빠를 향했다. 목에 닿을 뿐, 어떠한 충격도 주지 못한다. 아빠는 웃으며 "왜, 필요한 거 말하라며" 대답했다. 아빠는 안 할 가능성이 높은 결혼을 아직 포기하지 못하신 듯하다. 아빠는 결혼까지를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는 나도 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단단하게 여문 손날이 언제든 마중 나갈 채비가 되어 있으니까.
걸음의 속도는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생각대로 걸어야 할 이유는 없다. 감정에 맞출 필요도 없다. 걷는 속력을 의도적으로 늦춰보자. 걷는 방향을 의식적으로 바꿔보자. 어떤 대단한 일이 아니더라도 걷는 속력부터, 방향부터, 가볍고도 단순한 일부터 우리는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다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 보자. 놓치지 말자. 인생에서 이 순간보다 중요한 때는 없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과거를 통해 배우고 미래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지만, 순간이라는 찰나의 간격 뒤조차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우리가 해낼 수 있는 건 순간에 머무르며 자신에게 묻는 일이다. 자신만큼 자기를 잘 아는 사람은 없으므로 우리는 스스로 다정히 물어야 한다.
'이 속력이, 방향이 내가 원하던 것일까?'
'원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속도를 원했을까?'
'나는 왜 원하는 대로 걷지 못했을까?'
'나는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걸어 나가는 게 좋을까?'
알게 되었다면, 원하는 대로 걸음을 내어보자. 지금 당장, 자신에 의한 발걸음을 내디뎌보자. 자신을 위한 걸음이 쌓일수록, 놓칠 때마다 알아차리며 쌓아갈수록 진실한 자신에 가까운 삶으로 다가가는 스스로를 발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