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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곰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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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딩턴 Aug 04. 2021

노란 존재

여기 멜번의 겨울은 차다. 높은 건물들이 많이 없어서인지 내가 사는 주택가의 아침은 쌀쌀한 새벽 공기가 한참 머문다. 우리 집 입구에는 커다란 레몬 나무가 있다. 물론 내가 심은 것은 아니다. 이사 오기 전부터 이 집의 터줏대감처럼 입구에 덩그러니 서서 우리를 노란 물결로 반겨주던 기분 좋은 나무이다.  


꽃나무에 참 무심한 나는 레몬이 언제 열리는지 언제 따야 하는지를 잘 모른다. 차를 타고 레몬 나무를 지나다 보면 ‘텅’하고 차 머리에 레몬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그때는 레몬이 주렁주렁 매달려 나에게 ‘이제 레몬 딸 때야!”라고 말해준다. 그럼 그제야 바구니를 들고 나선다.


올겨울은 비도 많이 오고 날도 참 많이 춥다. 이런 추운 겨울, 동절기에는 모든 바깥 식물은 그들의 운에 맡기는 아주 게으른 습관이 있다. 반의반의 확률로 살 놈은 살고 갈 놈은 가고…  참 무책임한 주인의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차가운 계절을 수없이 견뎠을 레몬나무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해 낸다. 사계절을 지나는 동안 꽃도 피우고 떨구고 게다가 열매도 맺으면서 말이다. 무심한 주인한테 보란 듯…


지난번엔 얌전한 우리 집 강아지가 갑자기 화가 난 듯 짖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행인이 레몬을 따고 있었다.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당황했지만, 아이를 데리고 레몬을 따고 있는 그 여인에게 호통을 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내 수고 없이 잘도 자라 탐스러운 열매를 맺으니 당연히 나눠먹어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웃으며 ‘괜찮다’ 했다. 아마도 그녀의 저녁 식탁에 레몬 한 줌 짜 넣었어야 했나 보다.


그 후에는 레몬 시즌이 되면 레몬들 따서 바구니에 담아 이웃들 현관에 가져다 놓는다. 생긴 것도 제 각각, 반짝반짝 윤이 나고 잘 나가는 이름표를 달고 있지 않지만 혼자 힘으로 씩씩하게 자라난 레몬 나무가 나는 참 자랑스럽다. 게다가 나누는 기쁨까지 알게 해 주니 말이다. 돌보지 못했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만하면 거저갖은 소중한 선물인 듯하다.


우리는 여유가 있을 때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가끔은 내 것 챙기기에 더 급급할 때가 많다. 하지만 결국 나눔이 마음의 여유를 주는 것이다. 아니 우리 집 레몬 나무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다가오는 봄에는 고마운 레몬나무에 주인 노릇  톡톡히 해줘야   같다.  구수한 비료(여기서는 소똥이라고 )  포대 준비하고 어서 찬 겨울이 지나가길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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