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하교 시간이 빨라지면서 쉬는 시간도 함께 줄었다. 10분, 20분씩 쉬던 휴식이 80분 수업 뒤 5분 휴식으로 바뀌며 쉬는 시간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시국이 이런지라 수업 시간 틈틈이 자유 시간을 주기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견디고 있다. 짧아진 만큼 귀한 쉬는 시간이 되면 나는 아이들의 말을 열심히 경청한다. 아이들의 대화 속에 그들이 접하는 문화의 언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말을 듣고 쓰는지, 나는 무엇을 더욱 장려하고 어떤 표현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아이들의 말을 듣고 있자면 여러 가지 단어가 들린다. 그중 요 몇 달 새 대화에 부쩍 많이 등장한 것이 ‘잼민이’다.
“너 왜 그래? 잼민이냐?” “아유~ 이 잼민이들….”
잼민이는 모 BJ의 개인 방송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BJ의 방송에 잠시 나온 어린 조카의 웃음소리가 화제가 됐는데 그 조카의 이름을 조금 바꾸어서 ‘어린 남자애’, ‘어린애’, ‘어린애 웃음소리’ 같은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가 최근 들어 온라인 게임상으로 옮겨가면서 ‘이런 것도 못하냐, 잼민아’ 등의 비하 표현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린 연령’, ‘어린 목소리’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제는 ‘~린이’처럼 ‘미성숙한’, ‘유치한’, ‘개념이 없는’ 대신 쓰이는 용어로 바뀌어가고 있다.
온라인 실시간 수업으로 사회 인권 수업을 하며 잼민이와 ~린이에 대한 소재를 다루었다. “여러분, 잼민이나 ~린이란 표현 들은 적 있나요?” 나의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이 줌 화면을 넘어 들려왔다. 사회 책에 나오는 ‘인권 편지 쓰기’ 중 인권 침해 사례에 내가 듣거나 본 잼민이나 ~린이의 사례를 써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런 표현이 왜 인권 침해가 되는지 함께 알아보았다. “지금부터 잼민이나 ~린이가 들어간 표현을 지우고 대신 사용할 수 있는 표현으로 바꿔봅시다.”
표현을 바꿔보니 ‘어리다’, ‘못한다’, ‘유치하다’, ‘욕 같다’ ‘비하하는 표현 같다’ 등이 제시됐다. 이미 혐오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던 아이들은 물론,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아이들도 한 인격체인 자신들을 비하하는 표현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됐다. 어린이를 비하하는 표현은 올바른 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반에서 ‘잼민이’라는 말이 여러 번 사용됐음에도 굳이 제재하지 않았던 이유다.
초등학생 학급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반에서 잼민이라는 표현은 왜 자주 쓰였을까? 혐오 표현은 누군가에 대한 비하 행위를 ‘재미’로 만든다. 누군가 잼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정색하며 잘못된 것임을 지적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 반 아이들은 “야, 잼민이 하하하” 하고 함께 웃거나, 기분이 이상해도 그냥 넘겨버리곤 했다. 혐오 표현은 ‘불편한 것’,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혐오 표현이 왜 불편하고 잘못됐을까? 많은 이유가 있다. 인권, 동의, 존중,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 등 여러 개념을 들어 설명해 주면 혐오 표현에 경각심을 키워줄 수 있다.
혐오 표현에 예민해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힘의 차이, 즉 사회적 권력과 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선생님과 우리 반 00 학생 중에 누가 힘이 더 셀까?”라고 묻는다면 질문 속 ‘힘’의 개념을 모르는 아이들은 당황할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생의 눈높이에 맞는 구체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선생님이 00 학생에게 화가 나서 크게 소리를 쳤어요. 반대로 00 학생이 화가 나서 선생님에게 크게 소리를 질렀어요. 어떤 일이 더 문제일까요?”
아이들은 학생이 교사에게 화를 내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제재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후자를 택한다. 교사가 학생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은 물론 부당한 일이다. 그러나 학생이 교사에게 소리를 지르면 당장 ‘문제 행동’으로 낙인찍힌다. 이 두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학생들은 교사와 학생 사이의 권력 관계를 깨달을 수 있다.
‘주린이’, ‘부린이’, ‘헬린이’처럼 기존 단어에 ‘어린이’를 결합해 낮춤을 의미하는 표현이 많다. 그러나 ‘어른’이 비하의 표현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급식충’은 있어도 ‘직장인충’은 없다. 이 점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면서 꼭 인식시켜야 하는 사실이 있다. ‘사회적 약자의 인권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왜 어린이에게 비하 표현을 쓰면 안 될까? 왜 장애인을 낮추어 이야기하면 안 될까? 하는 질문을 함께 던져야 한다.
약자에 대한 혐오 표현은 재미의 탈을 뒤집어쓰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혐오 표현이 왜 불편한 것인지 알게 될 때, 아이들은 그 표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혐오 표현을 통해 사회적 권력에 대해 아이들이 어느 정도 알게 됐다면, 이 사회의 성별 고정 관념과 그로 인해 생기는 성별 권력을 학습해볼 수 있다. 먼저 학생들이 생각하는 ‘여자다움’ ‘남자다움’에 대해서 써 보도록 했다. 평소 ‘여자는 …’ ‘남자는 …’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를 떠올려 보아도 좋다. 그리고 나서 ‘골목식당’이라는 TV 프로그램의 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 후, 남자 MC와 여자 MC의 하는 일을 각각 포스트잇에 적어보게 했다. 남자 MC에 대해서는 주로 ‘설명하는 역할’, ‘진행자’, ‘말을 많이 한다’ 등의 답이 나왔고 여자 MC가 하는 일에 대해 가장 많이 나온 응답은 ‘웃는다’였다.
왜 그럴까? 이 사회의 성별 권력은 남성에게 마이크를 쥐어주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학생들이 적어놓은 ‘여자다움’, ‘남자다움’으로 돌아가 보자. 남자다움에는 ‘씩씩한, 앞서 나가는, 용감한, 리더십 있는’ 등이 있을 것이고 여자다움은 ‘얌전한, 정리를 잘하는, 다른 사람을 잘 돌보는’ 등의 특징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앞에서 나왔던 혐오와 성별 권력을 바탕으로 여성 혐오를 조금이나마 깨달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유명한 TV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방송된 영상 두 개를 준비했다. 첫 번째 영상에서는 여자 연기자가 남자들을 집에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했고, 두 번째 영상에서는 남자 연기자가 여자들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했다. 일단 두 영상을 시청했다. 첫 번째 영상에서는 남자 7명이 초대됐는데 음식을 적게 준비해서 모자랐다. 두 번째는 여자 3명을 초대한 뒤 이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에 MSG 가루로만 양념을 해 대접하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에게 영상을 시청한 소감을 적어보게 했다. ‘첫 번째 음식은 양이 좀 적다’, ‘두 번째는 가루로만 해서 웃겼다’라는 소감이 주를 이뤘다.
두 영상에 대한 실제 인터넷 반응은 어땠을까? 첫 번째 영상이 방영된 후에 해당 여성 연기자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사과문까지 올려야 했다. ‘음식을 적게 해 놓고 뻔뻔스럽다’, ‘개념 없다’, ‘민폐다’라는 댓글이 대부분이었다. 두 번째 영상에 대해서는 대부분 ‘새로운 요리법이다’, ‘재미있는 요리를 해서 호감이 생겼다’는 댓글이 달렸다. 학생들에게 첫 번째 영상의 주인공이 사과문까지 썼다고 말해주자 다들 어리둥절해했다. 댓글 몇 개를 순화해서 읽어주었더니 아이들은 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예시를 하나 더 들었다. 다른 여성 연기자의 SNS 논란이었다. 이 여성 연기자는 미술을 전공했는데, ‘이거 본인이 그린 건가요?’라는 질문에 ‘이런 질문은 정말 여러 번 받았습니다. 미술을 시작한 지는 20년이 넘었습니다’라는 요지의 답글을 달고 엄청난 악플에 시달렸다. 그 이유는 ‘말투가 여성스럽지 않아서’였다.
~했어요, ~했으면 좋겠어요 등 소위 ‘여성스러운 말투’, ‘애교가 있어 보이는 말투’를 쓰지 않고, 이모티콘도 빠졌다는 것이 여성스럽지 않은 여성에 대한 비난 이유라는 점을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이와 함께 프로그램에서 자주 찌푸리거나 호통을 치고 화를 내는 남자 MC들의 모습을 대조군으로 보여주었다. “왜 여성은 SNS에서 부드럽게 말하지 않았다고 비난을 듣고, 남성은 미디어에 나와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려도 비난받지 않을까?”라고 질문하자 ‘여자가 여성스럽지 않아서요’, ‘남자는 원래 그런 사람이 많아서요’ 등의 대답이 나왔다.
이를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 왜 여성 연기자들은 비난을 받았을까요? 둘째, 왜 음식을 미리 준비하지 않고 MSG로만 요리를 해서 대접한 남자 연기자는 칭찬을 받았을까요? 학생들은 대부분 ‘여자답지 않아서’, ‘여자인데 요리를 적게 해서’, ‘남자 연기자는 재미있어서’라고 대답했다.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성인들 역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남성은 TV에 나와 요리를 많이 하든 적게 하든, 이상한 요리를 내든 사람들은 이에 대해 그렇게 거슬리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은 다르다. 요리를 적게 해도 욕을 먹고, 이모티콘을 안 붙이거나 쿠션어(부드럽게 돌려서 말하는 표현)를 쓰지 않고 이야기해도 욕을 먹는다.
이 사회의 성별 고정 관념과 성별 권력을 더 쉽게 한눈에 알아보기 위해 TV에 나오는 여성과 남성을 비교해보는 방법이 있다. 인기 예능 프로를 한데 모아 놓고 여성과 남성을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출연진 중 어느 성별이 많은지, 다양한 연령대와 외모를 하고 있는 성별이 누구인지 찾아보라고 하면 아이들은 금방 찾는다. 미디어의 여성 출연자 수가 무척 적고, 그들 모두 마르고 예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이제 이 사회가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다양한 개성은 남성들의 몫이고 여성의 역할은 ‘웃어주는’ 역할에 그친다는 것을 말이다.
만약 앞에서 예로 들었던 ‘나 혼자 산다’의 남성 연기자가 ‘여성스럽게’, ‘아주 세심하게’ 요리를 준비하고 집을 꾸몄다면 그만큼의 좋은 반응을 얻었을까? 비우호적인 반응을 받는다 해도 요리를 적게 했다는 이유로 사과문까지 썼던 여성 연기자만큼의 비난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SNS에 무뚝뚝한 답변을 올렸다며 악플에 시달린 또 다른 여성 연기자가 만약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아무도 말투를 가지고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여태까지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전, 외부강사 수업 중에 ‘언니’라는 단어는 원래 남녀 모두에게 쓸 수 있는 표현이었다고 알려줄 기회가 있었다. 그러자 몇몇 남학생이 “우리도 머리 길러야겠다”며 웃었다. 그러자 한 여학생이 “그건 성별 고정 관념이야!”라고 큰소리로 말했고, 다른 남학생 한 명도 “맞아, 우리 선생님도 여자인데 머리카락이 짧잖아”라고 맞장구쳤다.
어린이들은 잘못된 성별 고정 관념을 깨우쳐주면 금세 우리 주변의 성차별을 알아차린다. 성차별이 왜 나쁜지, ‘나답게’ 자라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려주면 교사보다 더 예민하게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사실, 교사가 알려주기 전부터 이미 그러한 차별을 느끼고 있었던 어린이들도 무척 많다. 그런 어린이들은 젠더 감수성 수업을 목말라하고, 관련 수업을 실시하면 너무나 반가워한다. 그렇게 변화하기 시작한 아이들은 TV와 인터넷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언어 사용과 행동에 조금씩 변화가 시작된다. 우리가 끊임없이 젠더 감수성을 키우고, 아이들의 세상을 넓혀줘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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