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 3국 여행기] ㅡ산다는 건, 어느 플루티스트의 깊

by 박은아

[발트 3국 여행기] ㅡ산다는 건, 어느 플루티스트의 깊은 호흡을 찾아서


2장

<<빌뉴스와 드디어 만나다>>

~숲에서 시작된 노래, 빌뉴스, 첫 마을의 풍경



헬싱키 공항에서 비행기는 한 시간가량 지연됐다.

창밖에는 여명이 스미듯 흐릿한 빛이 번져오고, 긴 비행 끝에 굳은 몸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이제 곧 빌뉴스에 닿는다’는 생각이

마음 깊숙이 잔물결처럼 번져왔다.


현지 시각 오전 9시 28분, 드디어 빌뉴스 공항.

예상보다 긴 입국 절차에 라운지를 들를 겨를도 없었다.

짐도, 몸도, 시간마저 무거웠지만

설렘은 한 발 앞서 공항 문을 나섰다.

구겨진 몸을 펴는 순간조차, 작은 기적 같았다.


발트 3국의 첫 나라, 리투아니아의 수도에 첫발을 내디뎠다. 빌뉴스 호텔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라 짐만 맡기고 돌아봐야지 했는데, 일찍 체크인을 해준다. 예상밖의 행운, 그 순간 첫인상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모른다. 구겨진 몸을 뉘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장장 25시간 가까운 비행 끝에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감사와 충만함이었다.


빌뉴스는 인구 약 58만 명, 면적 401㎢의 도시로, 서울보다 인구는 훨씬 적지만 면적은 비슷하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푸른 숲과 강이 맞닿고, 중심가에는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 건축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진다. ‘빌뉴스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오래된 붉은 벽돌 성당 옆에 세련된 유리 건물이 서 있는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거리를 걷다 아직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푸른색과 노란색의 국기와 포스터, 버스 외벽에 그려진 평화 메시지가 곳곳에 눈에 띈다. 빌뉴스 시민들은 바쁘지만 표정이 무겁지 않고, 학생들은 자유로운 복장으로 등하교를 한다. 리투아니아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 교육을 기본으로 하며, 대학 진학률도 높다. 최근엔 IT 산업과 스타트업이 빠르게 성장해 ‘발트의 실리콘밸리’라 불릴 정도다.


비행기 밖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느껴지는 충만한 자유로움과 창밖으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햇살에 이끌려 곧장 거리로 향했다. 고딕 양식의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성당, 창틀마다 꽃이 걸린 아기자기한 주택, 그리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변의 다리. 때마침 강변에 하얀 에델바이스들이 가득했다. 그 모든 것이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있는 듯했다. 이제 빌뉴스의 하루를 맞이할 시간이었다.


유럽은 어디를 가든 올드타운이 보존되어 있어, 마치 역사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듯한 감각을 준다. 그래서일까,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아, 드디어 왔구나’ 하는 반가움이 먼저 찾아왔다. 동시에 왜 우리나라는 오래된 것들을 지켜내지 못하고 아파트 천국이 되어 가야 하는지, 그 안타까움과 부러움이 마음속에 스쳤다. 얼마 전 200년이 된 선조부터 내려오던 집을 지키고 싶다고 안타까워하던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 아파트가 올라가는 그곳. 바로 우리 동네였다.


하얀 돌길과 고풍스러운 건물이 이어진 빌뉴스의 올드타운을 음미하듯 천천히 걸었다. 골목마다 시간이 멈춘 듯 고즈넉했고, 창가마다 정성스레 걸린 화분이 이곳 사람들의 일상을 말해주는 듯했다. 오월의 향기와 맞닿아있었다.


그렇게 걷다 우리가 찾은 첫 식사는 ‘Bistro 18’에서였다.

트러플 버섯 리조토와 함께, 두 코스로 무겁지 않게 시작할 수 있는 음식을 골랐다. 인테리어도, 주인도, 그 길의 분위기와 참 잘 어울렸다. 빌뉴스가 내게 건네는 첫인사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트러플 향은 마치 숲 속을 걷는 듯 은은했고, 숟가락을 들 때마다 마음까지 차분해졌다.


빌뉴스는 크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오래된 보고 싶었던 책장을 넘기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거리를 걸으면 숨겨진 악보를 찾는 기분이었다.


훌쩍 키가 큰 사람들 사이로 올드 타운을 걸었다.

자전거를 빌리려 했으나, 전화번호 인증에 막혀 포기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느리게 걷는 것만큼 진짜 여행도 없을 테니까.


올드타운의 주인공처럼 서 있는 하얀 대성당 앞 광장에 섰다. 네오클래식 양식의 도릭 기둥 여섯 개가 받치는 삼각형 박공이 하늘을 향해 당당히 서 있고, 그 위에는 성인 조각상이 빛을 머금은 채 도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석양이 대리석 기둥을 금빛으로 물들이자, 표면에 새겨진 미세한 결마저 수백 년의 기도를 품고 있는 듯 보였다. 빌뉴스 대성당((Vilnius Cathedral)은 14세기, 리투아니아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직후 세워졌다. 한때 이교도의 신전이 있었던 자리에 세워졌고, 이후 화재와 전쟁, 소련 시기의 억압 속에서도 여러 차례 재건되었다. 바로 옆 57m 높이의 팔각형 종탑은 원래 성벽의 방어탑이었으며, 지금은 올드타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되었다.

성당의 무겁고도 진중한 문을 열자 하얀 기둥이 늘어선 중앙 통로 양옆에는 프란치스체크 스무 글레비치가 그린 성경 장면들이 걸려 있었다. 특히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된 성 카지미에르 예배당은 리투아니아의 수호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있어, 은빛 관 앞에선 누구나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유럽 여행을 가게 될 때마다 항상 찾는 곳은 올드타운, 성당, 도서관들이다. 이곳에서 처음 찾은 성당에서 조용히 기도했다. 비워둔 마음을 천천히 채우는 의식처럼, 그 순간 이곳의 공기와 시간, 빛이 모두 기도가 되어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게디미나스 성탑‘으로 향했다. 전망이 아름답다는 그곳. 늘 그렇듯 아름다운 전망을 보기 위해서는 그만큼 올라야 한다. 힘겹게 올라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무가 많은 나라답게 나무 계단이 끝도 없이 정상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미끄러웠다. 한 계단, 한 계단 비와 함께 오른 정상,

성탑 정상에서 내려다본 빌뉴스, 빗방울이 닿은 붉은 지붕들이 반짝였고, 그 사이로 키 큰 숲이 하늘을 가리려는 듯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검은 강—네리스 또는 빌냐—이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이 성탑은 중세 시대 상부 성(Upper Castle)의 유일한 남은 건축물로, 원래는 14~15세기에 건축된 방어용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성탑 내부는 현재 박물관으로 활용되며,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빌뉴스 성의 모형, 무기, 고고학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크루세이더의 공격 장면을 체험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전시와, 발트의 길(Baltic Way)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도 지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열린 전망대—그곳은 마치 도시 전체를 손에 쥔 듯한 장소였다. 성탑 위에는 리투아니아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는데, 이는 이곳이 단지 성곽이 아닌, 리투아니아 정신과 독립의 상징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 다행히 푸니쿨라를 발견했다. 이 경사진 언덕을 65m 길이에 경사 37°의 슬로프를 따라 1분 만에 오르내리는 전기 리프트는 16명 정원으로, 얼마나 문명이 고마운지 새삼 느꼈다. 올라갈 땐 왜 못 봤지? 하면서.


올드 타운의 하얀 돌의 온기, 향기와 온도가 좋았던 트러플 리조토의 첫 식사, 대성당의 기도, 빗물에 젖은 탑, 빌뉴스와의 첫 만남에 걷는 발걸음의 리듬이 하나의 악장이 되어 여행 첫 페이지를 적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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