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아플 리가 없는데...

<군부심위원회 1편>

by 고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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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연천군에 있는 한탄강 근처에서 근무했다. 람보가 쓰던 M60 기관총이 내 주특기였다. 비상이 걸리면 M60을 메고 한탄강을 뛰어 넘었다. 무장을 하고 한탄대교를 뛰어 넘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힘들어하면 할수록 고참은 뒤통수에 욕을 해댔다. 육체도 정신도 너덜너덜해졌다. 거짓말 같으면 맨몸으로 한강다리를 전력질주로 달려보라. 상쾌한 바람이 뒤를 밀어주어도 무진장 힘들꺼다. 그렇게 나는 이등병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등병인 나에게는 너무도 힘들었던 연대급 훈련이 있었다. 일주일 훈련이 끝나자 나는 왼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긴 행군이 나에게는 무리였던 것이다. 어떻게 힘이 잘못 들어가면 주저앉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괜찮냐?'고 고참이 물으면 목이 터저라 '괜찮습니다'를 외쳤다. 며칠이 지나 아무래도 이상했던지 고참이 의무대에 데려갔다. 의무대에서는 퉁퉁부은 발을 보더니 안티프라민을 발라주었다. 며칠만에 군의관을 만났건만 군의관은 "더 악화되면 오라"는 만병통치 처방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절룩거리며 2달동안 안티프라민을 바르고, 매주 들러 '더 악화되지는 안았다고' 경과를 보고했다. 고참들이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나야 꾀병으로 보일지 모른다는 찜찜함을 안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중얼거렸던 군의관의 말이 생각난다.


'이렇게 오랫동안 아플리가 없는데'


드디어 일병 휴가를 맞아 서울가는 기차를 탔다. 당연히 제일 먼저 간 곳은 정형외과였고, X ray를 찍었다. 피로골절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심한 피로골절이었는데 두달 넘게 방치해서 뼈가 다시 붙었다고 했다. 의사는 X ray를 가리키며 옹이가 진 곳이 골절되었다 붙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옹이가 진 채로 붙었으니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당분간 조심하라고 했다. 허탈했다. 당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한편, 최소한 왼발이 아픈 이유는 알게 되어 안심이 됐다. 진단서를 받아 고참과 지휘관에게 보여주어 내가 꾀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군의관에게 보여주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왼쪽 발은 발가락이 안쪽으로 굽혀지지 않는다.


25년이 지난 2018년이 되었다. 나는 이등병에서 중령이 되었다. 엄청난 진급이다. 인생은 알 수 없다더니 이등병때 내가 중령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삶은 그렇게 예측을 허용하지 않는다.


허리 통증이 있어 군의관에게 갔다. Xray를 보고 군의관은 간명한 처방을 했다.


'심하게 아플리가 없다'


약 먹으면 곧 나아질 것이라며 한 움큼 약을 처방해줬다. 그러니 나는 다음 날부터 한방 군의관에게 가서 침을 맞았다. 침에 전기자극까지 포함해서 매일 맞았다. 조금 좋아지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지만 어쨌든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다. 열흘쯤 지났는데 허리의 통증이 쌓이기 시작하더니 의자에서 일어나기도 어렵게 되었다. 차에 타거나 내리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되었다. 아무래도 큰 일 날 것 같아 의무대에 다녀오기로 했는데 건물입구에서 한발짝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의무대 응급차를 불렀다. 응급차는 걸어서 10분인 거리를 20분이 지나 도착했다. 골든타임 뭐 이런 것 없었다. 어찌어찌 응급차를 타고 3분만에 의무대 응급실에 도착했다. 군앰블런스에 나를 내리는데 침대 발받침이 펴지지 않아 바닥에 침대채 떨어졌다. 상황만 보면 개그였다. 이송하는 병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겠는가. 서 있을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사람인데. 침대채 땅바닥에 떨어졌는데.

병사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이미 떨어진 것이고, '괜찮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응급실에 신경외과 군의관이 와 발을 이래저래 만져보고 '터진 것 같다'는 처방과 함께 상급 군병원으로 이송해야겠단다. 허리는 너무 아파왔고, 아무생각을 할 수가 없게되었다. 눈을 감고 '으...' 아픔을 참고 있었다. 의무대 간부가 오더니, '소속 사무실에서 동승자 있어야 합니다' 같이 동승할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말했다. 의식을 잃기 전에 동승자를 구해오라는 소리로 들렸다. 말도 거의 못할 지경이었는데 어떻게 환자가 동승자를 구한다는 말인가. 어찌어찌 동승자 없이 상급 군병원으로 출발했다.


도착한 병원 응급군의관은 나에 대해 몇가지 확인하더니 전화기로 갔다. '전화도 없이 환자를 보냈다'고 우리부대 의무대에 투덜거렸다. 두 의무대는 나를 옆에 두고 업무분장을 하고 있었다. 누워 있는 나는 일감에 불과했다.


그래도 바로 Xray와 CT를 찍었다. 담당 군의관의 처방 역시 간명했다.


'이렇게 아플 리가 없는데...'


토.일요일에 집에 있다가 월요일에 MRI를 찍고 다시 보기로 했다. '이렇게 아플 리가 없는' 환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토.일요일에 점점 심해져서 누워만 있을 수 있게 되었고 나중에는 목만 움직일 수 있었다. 뒤척일 수도 없었다. 움직일 수 없는 군인이 군인아파트에서 군병원으로 이송하는 것이라 군앰블런스를 신청했다.


'선탑이 지원되어야 합니다'


* 선탑 : 운전병 옆 조수석에 앉아 운전병을 지도감독하는 장교, 부사관


군앰블런스를 지원하면 응급조치가 가능하도록 지원을 해야지, 차량만 지원한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인가. 사용하고 싶으면 선탑간부까지 준비하고 신청하라는 말이었다. 어찌어찌 협조하여 의무대에서 선탑까지 포함해서 군앰블런스를 지원해 주었다. 앰블런스에 누워 하늘을 보니 이순신 동상, 교보문고, 세종문화회관이 보였다. 어슴프레한 아침에 출근에 바쁜 자동차와 사람들이 보였다. 너무나 낯선 시선이었다. 언제나 내가 세상을 떠나기 위해 병원에 들어갈텐데, 그때 볼 마지막으로 시선이라고 생각하니 슬펐다.


월요일 아침, MRI 촬영기사는 '이렇게 아플줄 알았으면 금요일날 찍을 껄 그랬네요'라는 허망한 말을 했다. 이어서 MRI를 본 군의관이 내게 첫 마디는 더 강력했다.


'이렇게 아플리가 없는데...'


내가 비록 의사는 아니지만, 결과물인 내가 이렇게 아프면, 진단에서 놓친 것은 없는지, 어떤 다른 가능성이 있을런지, 통증을 완화할 다른 방안은 무엇인지를 연구해야될 것 같은데, 통증 자체에 대한 의문을 날리면 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몰핀 수액을 맞고 몰핀 패치를 붙이고 승용차를 타고 민간 척추전문병원에 갔다. 군 병원에서 촬영한 MRI 촬영 CD를 본 민간의사는 바로 찢어진 곳이 두 군데 있으며 통증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많이 아팠을 텐데요...'


첫째 날, 척추 주사처방을 받았다. 바로 링거봉 밀고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다섯째 날 시술 받고 퇴원했다.


아프다는 사람에게 아플리가 없다는 말처럼 잔인한 말이 있을까?

의학적인 의문보다는 최소한 '많이 아팠겠다'는 공감의 말이 먼저여야 되는 것이 아닌가.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생겼다.


'이렇게 아플리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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