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 같은 법률

(감사에서 살아남기)(53)

by 고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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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 같은 법률>



권력자는 모호한 법률을 선호한다. 모호한 만큼 자신이 법률 해석권이 넓어지고, 넓어진만큼 권력은 강해진다. 권력자를 통제하는 법률을 만들 때도, 권력자는 모호한 법률을 선호한다. 만들어야 해서 만들었지만,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법률의 취지에 공감할 뿐, 세부사항은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 정할 것이다.


공직자의 이해충돌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인 이해충돌방지법이 만들어졌다. 권력자들은 공직자가 어련히 알아서 정의롭게 판단할 것인데 모호한 개념인 ‘이해충돌’을 법률로 제정하면 여러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명확성, 필요성, 비례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2013년 국회에 제출된 이후 8년동안 국회에서 계류중이었다.


2021년 3월 LH 직원들의 땅투기 사태로 촉발된 국민의 분노를 발판삼아 이해충돌방지법은 2021년 4월 29일 통과되어 2022년 5월 19일부터 시행중이다. 시행 당시 공직자들은 긴장하였으나 시행 1년이 다되어가고 있지만 이렇다할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적은 없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아도, 공직자들 이해충돌방지법에 대한 의무교육만을 이수할 뿐 이해충돌방지라는 새로운 의무를 체감하지는 못하는 듯 하다.


계속 논쟁중이었던 ‘이해충돌’이라는 포괄적 개념이 법률로 통과되었다는 것은 통과될만한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포괄적인 개념일수록 없었던 의무를 창설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했던 의무를 다시 한번 선언하는 경우가 많다. 이해충돌방지법은 기존에 있었던 ‘공무원행동강령’의 내용을 법률로 만든 것이다. 대부분 기존에 있었던 공직자의 의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해야 할 행위, 하지 말아야 할 행위 등 10가지 의무가 규정되어 있다.


해야 할 행위인 신고 및 제출의무 5가지는 ① 사적 이해관계자 신고 및 회피·기피 신청, ② 공공기관 직무 관련 부동산 보유·매수 신고, ③ 고위 공직자 민간부문 업무활동 내역 제출, ④ 직무 관련자와의 거래 신고, ⑤ 퇴직자 사적 접촉 신고다.


하지 말아야 할 행위인 제한·금지 행위 5가지는 ① 직무 관련 외부 활동의 제한, ② 가족 채용 제한, ③ 수의 계약 체결 제한, ④ 공공기관 물품 등의 사적 사용·수익 금지, ⑤ 직무상 비밀 등 이용 금지다.


10가지 의무 중에 ‘직무상 비밀 등을 이용’하여 대가를 수수하는 경우에만 형사처벌 내용이 있다. 직무상 비밀을 이용하여 대가를 수수하면 그 자체로 뇌물죄나 다른 직무범죄에 해당할 것이니 새로운 의무라고 보기 어렵다.


나머지 9개 항목의 벌칙은 징계 및 과태료인데, 9가지의 내용은 국가공무원법 제7장(복무)에 규정된 성실의무, 공정의무, 겸직금지, 영리행위금지에 대부분 해당되고, 국가공무원법 위반 역시 징계사유에 해당되니 상당부분이 중첩된다. 결국 과태료의 신설만이 남는데, 공직자에게 징계가 없는 ‘과태료’는 크게 와닿는 부분은 아니며, 공직자들은 징계만으로도 불이익은 크다고 생각하므로 과태료 처분까지 부과하지 않는 경우가 다수일 것이다.


이처럼 이해충돌방지법은 기존에 있는 국가공무원법, 청탁금지법(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부패방지법(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 공직자윤리법의 내용과 정신들이 모아져 있다고 보면 되겠다. 기존의 법령을 준수한다면 이해충돌방지법 위반의 문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운영부서의 측면에서 본다면, 징계전 감사, 청탁금지법, 부패방지법, 공직자윤리법 운영부서인 감사실이 이해충돌방지법을 담당한다.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예방, 교육, 적발할 것이다. 이해충돌방지법상 형사처벌 조항을 살펴보면 별도로 입건하기 보다는 형사처벌 입증이 어려워진 경우 예비적으로 운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해충돌방지법을 언뜻 보면 마치 공직자의 직무관련 법령을 모아놓은 듯 하다. 감사원, 행정안전부, 국민권익위원회, 인사혁신처 등에서 관여하였던 다양한 분야를 법률 하나에 모아놓았다.


중대한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관련 기관이 모두 모여 매뉴얼을 만들고 대책이라고 선언한다. 취합하였으므로 새로운 내용은 없다. 새로운 내용이 없으므로 신규 조직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매뉴얼 관리는 취합담당자의 부수업무가 된다. 매뉴얼이란 책자만이 남는다.


감사관은 이해충돌방지법 조항이 없다 하더라도 성실의무, 공정의무, 겸직금지, 영리행위금지 등 폭넓게 조사할 권한이 있다. 감사가 시작되었다면 감사관의 머릿속에는 ‘이해충돌방지법’보다는 공직자의 의무규정이 채워져 있을 것이다. 공직자의 의무위반이 훨씬 더 직관적인 감사보고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감사가 시작되면 이해충돌방지법이라는 구체적인 법률보다, 공직자의 어떤 의무를 위반했다고 의심받는지, 나는 어떻게 소명할 것인지, 증거는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사건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생각하고 써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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