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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은 자유의 산만함이 없다.

(소쇄원, 자전거여행)(4)

by 고길동

https://blog.naver.com/pyowa/223230639082




도시에는 산과 강이 있다. 김훈은 무등산을 넘으면서 이 산은 다른 도시의 산과 뭔가 다르다고 느꼈을 것이다. 뭐가 다를까. 이러저리, 멀리가까이 생각했을 것이다.


"무등산은 삶 속의 산이다. 무등산은 사람을 찌르거나 겁주지 않고, 사람을 부른다. 아마도 이 산은 기어이 올라가야 할 산이 아니라 기대거나 안겨야 할 산인 듯 싶다."


정자를 바라보고, 정자에서 바라보며 석양을 맞이했던 모양이다. 별 효용도 없어 보이는 이런 정자를 많은 돈을 들여 만든 이유를 생각해봤을 것이다. 멀리서 보아도 도드라보이지 않고, 안에 있어도 호쾌한 시야와는 거리가 먼 정자를 왜 만들었을까 생각하다 저녁을 맞게 되었을 것이다.


"정자는 현실의 중압감이 빠져나간 자유의 공간이다. 정자는 삶과 격절된 자리도 아니고 삶의 한복판도 아니다. 정자의 위치는 들판보다 조금 높지만 아주 높지는 않다. 산꼭대기에 지은 정자도 있기는 하다. 이런 정자는 대개가 경관에 엑센트를 주기 위한 것이고, 사람이 모여서 노는 문화 공간은 아니다. 정자는 그 안에서 세상을 내다보는 자의 것인 동시에, 그 밖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자의 것이다. 정자는 '본다'는 행위가 갖는 시선의 일방성을 넘어선다. 시선의 일방성에는 폭력이 숨어 있다. 이 폭력도 근대성의 일종이다."


"모든 석양은 장엄하다. 석양은 생을 껴안고 간다. 큰 것이 아닌 보다 작고 하찮은 것들을. 산의 석양은 우리들 상처입은 생을 장엄 속에서 위로한다. 괜찮다. 다 괜찮다고."


소쇄원은 조광조의 문하생 양산보가 지었다. 조광조는 정조 10년(1515년)에 알성시에 급제하여 1519년 12월(음력) 역모혐의로 사약을 받았다. 서른 일곱이었다. 조광조는 과거에 급제 후 4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대사헌에까지 오르고 정국을 장악했다. 조광조의 책문, 경연의 글을 읽으면 논리와 근거, 묘사와 예시가 힘차다. 서른 중반의 조광조의 글이 부럽다. 참고할 문헌도 적었을 것이고, 관료의 경험도 풍부하지 못하고, 행정에 바빴을 것인데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이율곡, 박지원, 홍대용, 신채호의 글도 언제나 놀랍다. 이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글이란 많은 책을 읽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정보의 양이 중요하지 않다. 생각만 해서도 역시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 좋은 책을 여러번 읽고, 자주 글을 쓰며, 현장에서 움직여야 한다.


"조광조는 조선 성리학의 정치적 절정이었다. 현실 속에서 왕도정치의 낙원을 건설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시골에 정자를 지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조광조는 기묘사회에 죽었고, 낙원은 문을 닫았다."


"조광조가 죽자 그의 낙원 건설을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던 문하생 양산보는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와 또 다른 낙원을 건설했다. 이 낙원이 소쇄원이다. 불우한 자들이 낙원을 만들고 모든 낙원은 지옥 속의 낙원이다."


난 어려서 대나무밭에 살았다. 대나무밭이 우리집 벽이었다. 조금 더 잘 사는 집은 탱자나무가 벽이었고, 아주 잘 사는 집의 벽은 담이었다. 대나무를 베어 바람개비, 연, 활, 이런 걸 만들었다. 글을 읽으니 대밭의 빽빽한 가지런함, 바삭마른 대밭의 느낌이 그대로 떠오른다.


"대숲은 자연림이지만 활엽수림처럼 자유의 산만함이 없다. 대숲은 가지런하고 단정하다. 봄의 대숲은 자작나무숲이나 오리나무숲처럼 생명의 기쁨으로 자지러지지 않고, 여름의 대숲은 다른 활엽수림처럼 비린내 나는 습기를 내뿜지 않는다. 대숲은 늘 스스로 서늘하고, 잘 말라서 질퍽거리지 않는다. 대숲은 늘 꿈속처럼 어둑어둑하다. 대나무숲은 전투적 이념의 절정이며 은둔의 맨 뒷전인 것이다."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대나무는 죽순이 나와서 50일 안에 다 자라버린다. 더 이상은 자라지 않고 두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 왕대는 80년에 한 번씩 꽃을 피운다. 눈이 내리듯이 흰 꽃이 핀다. 꽃이 피고 나면 대나무는 모조리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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