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안 경작지, 자전거여행)(3)
https://blog.naver.com/pyowa/223229528695
김훈하면 '문체'다. 강력함과 통찰력을 가진 짧은 문장. 이것이 김훈의 문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칼의 노래 첫문장인데, 김훈을 대표할만한 문장이다. 이 웅장한 문장은 책을 읽기전에도, 다 읽고나서도 힘을 읽지 않는다. 오히려 강해진다.
이런 문장이 우연히, 어쩌다 한 번 쓰여졌겠는가. 김훈의 글을 읽으면 통찰력을 가진 강력한 문장을 여러번 만날 수 있다. 이번 '남해안 경작지'부분의 첫문장도 그렇다.
봄의 흙은 헐겁다.
이런 문장은 아무나, 아니 누구도 쓸 수 없다. 김훈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다. 일곱 글자의 문장을 읽자마다 나는 압도당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김훈은 자전거를 세워놓고, 부풀어오른 땅을 발로 꾹꾹 눌러보았을 것이다. 곧이어 쪼르려 앉아 밭을 손가락으로 눌러보았으리라. 밭을 가는 농부에게 봄날 부풀어오른 흙에 대해 말을 붙였을 것이다. 봄이 오는 주위를 둘러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곁에 자전거를 세워놓은 쉰 두살의 김훈이 그려진다.
봄의 흙은 헐겁다. 언 땅이 녹고 햇볕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흙의 관능은 노곤하게 풀리면서 열린다. 봄에 땅이 녹아서 부푸는 과정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행복하다.
땅 위의 눈을 녹인 초봄의 햇살은 흙 표면의 얼음을 겨우 녹이고 흙 속으로 스민다. 흙 속에서는, 얼음이 녹은 자리마다 개미집 같은 작은 구멍들이 열리고, 이 구멍마다 물기가 흐른다. 밤에는 기온이 떨어져서 이 물기는 다시 언다. 이때 얼음은 겨울처럼 꽝꽝 얼어붙지 않고, 가볍게 언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햇살이 내리쬐어 구멍마다 얼음은 녹는다. 물기는 얼고 녹기를 거듭하면서 흙 속의 작은 구멍들을 조금씩 넓혀간다. 넓어진 구멍들을 통해 햇볕은 조금 더 깊이 흙 속으로 스민다. 그렇게 해서, 봄의 흙은 헐거워지고, 헐거워진 흙은 부풀어오른다.
김훈은 헐거운 밭을 누르다 밭두렁에 나있는 봄나물이 눈에 띠었을 것이다. 냉이, 달래, 쑥을 보였을 것이다. 미나리도 생각나고, 된장국, 고추장, 재첩국이 이어졌을 것이다. 된장국 속의 냉이를 그려내는 솜씨는 정말 일품이다.
된장은 냉이이의 비밀을 국물 속으로 끌어내면서 냉이를 냉이로서 온전하게 남겨둔다. 냉이 건더기를 건져서 씹어보면, 그 뿌리에는 봄 땅의 부풀어오르는 힘과 흙냄새를 빨아들이던 가는 실뿌리의 강인함이 여전히 살아 있고 그 이파리에는 봄의 햇살과 더불에 놀던 어린 엽록소의 기쁨이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