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꽃피어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여수 돌산도 향일암, 자전거여행)(2)

by 고길동

https://blog.naver.com/pyowa/223229030196


겨울에는 봄의 길들을 떠올릴 수 없었고, 봄에는 겨울의 길들이 믿어지지 않는다. 다 지나오고 나도, 지나온 길들이 아직도 거기에 그렇게 뻗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나온 모든 것이 믿기지 않는다. 지난 가을만해도 내년 가을에 교대역 사무실에 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9월만해도 10월의 시큰한 바람을 감각할 수 없었다. 살아가는 이들이 계절을 살지는 못한다. 그들은 겨우 허겁지겁 왔다갔다 할 뿐이다. 비가오면 우산을 쓰고, 더우면 에어컨을 켜고 산다. 계절은 모두의 것이 아니다. 느끼는 사람의 것이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동백은 피어서 군집을 이루지 않는다. 개별자로 피어나는 그 꽃들은 제가끔 피어서 제가끔 떨어진다. 절정에서 바로 추락해버린다. 그래서 동백이 떨어진 나뭇가지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문득 있던 것이 문득 없다. 뜨거운 애욕의 정념 혹은 어떤 고결한 영혼처럼.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목련은 등불이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그 꽃은 죽임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동백, 매화, 목련이 등장한다. 모두 각각의 절정이 있다. 동백은 꽃봉우리가 떨어지는 순간, 매화는 펄펄 날리는 꽃잎, 목련은 촛대처럼 봉우리는 치켜 올린 힘이 절정이다. 글로 보고서야 꽃을 다시 한 번 올려다 본다. 아. 그렇구나. 목련꽃은 남루하고 참혹한 죽음,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서 떨어지는 목련, 바닥에 밟히며 갈색으로 흙과 뒤섞이는 목련을 다시 보게 된다. 정말, 그렇구나.



설요는 한국 한문학사의 첫장에 나온다. 7세기 신라의 젊은 여승이다. 이 젊은 엿으의 몸은 꽃피는 봄 산의 관능을 견딜 수 없었다. 그 여자는 시 한 줄을 써놓고 절을 떠나 속세로 내려왔다.



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瑤草芳兮思芬蘊(요초방혜사분온)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將奈何兮是靑春(장내하혜시청춘)


이것은 대책이 없는 생의 충동이다. 그 충동은 위태롭고 무질서하다. 절을 떠날 때 그 여자는 스물 할 살이었다. 속세로 내려와서 그 여자는 시 쓰는 사내의 첩이 되었고, 당나라를 떠돌다가 통천에서 객사했다. 7세기의 봄과 13세기의 봄이 다르지 않고, 올 봄이 또한 다르지 않다. 그 꽃들이 해마다 새롭게 피었다 지고, 지금은 지천으로 피어 있다.



'자전거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 중의 하나다. '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설요는 파계하고 시쓰는 남자의 첩이 되어 당나라를 떠돌다 객사했다. 파계승의 운명도 예감했으리라. 젊음의 설레임도 컷겠지만, 젊음이 이대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더 컸을 것이다.



멀리서 보면 새 둥지처럼 작은 절이고, 절 마당에서 보면 우주처럼 큰 절이다. 절 마당에 이르면 갑자기 남해의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서, 이 절 마당은 수직적인 고양감과 수평적인 무한감으로 가득하다.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보고, 저기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시점을 바꾸고, 줌인 줌아웃을 할 줄 알아야한다. 계절을 느낄 때, 상황을 인식할 때, 글로 돌아볼 때 반드시 필요한 방식이자, 중요한 능력이다.


https://youtu.be/DLbqpwF-AuI



06_%EB%AA%A9%EB%A0%A8%EB%82%98%EB%AC%B4_%EA%BD%83.jpg


keyword
이전 02화오르막과 내리막은 정확하게 비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