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곡의 '만언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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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은 13세에 진사시를 합격하고, 대과에 응시하여 9번 합격(33명 선발)하고, 그 중에서 7번을 장원(1등)하였다. 율곡의 천재성은 그가 불교에 출가한 적이 있다는 사실마저도 흠이 되지 않을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율곡의 과거 답안지는 지금봐도 너무나 놀랍다. 예측할 수 없는 문제를 마주하고, 짧은 시간에 문장을 엮어내는 능력은 인간의 솜씨가 아니다.
선조 6년, 1573년 태양을 향해 흰색무지개가 떴다. 전쟁을 예보하는 흉조였다(19년 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흉조를 마주하고 자신의 통치에 뭔가 잘못이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 돌아봤다. 최소한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선조는 신하들에게 임금의 통치에 대해 꺼리낌없이 어떠한 것이라도 의견을 내라고 하였다.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1574년 38세 율곡은 정3품 우부승지였다. 율곡은 만 글자의 상소문이라는 '만언봉사'라는 썼다.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1519년 기묘사화, 1545년 을사사화를 거친 때였다. 사화가 일어나면 문장하나 꼬투리 잡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고, 많은 일가가 폐족되었다. 임금의 요구대로 상소를 한다한들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말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눈으로 보았다. 그 속에서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만언봉사'의 호기는 남다르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하들은 승진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임금은 인재의 부족을 한탄하고, 자신의 뜻을 몰라주는 신하를 원망했다.
한 시대는 다른 시대로부터 인재를 빌리지 않는다. 빌리지 못한다. 세상의 이치는 그 시대에 맞는 인물을 어딘가에 배출해 놓고 있다. 있는 인재로 꾸려 써야 한다. 모든 시대가 그랬다. 인재가 없다면 인재를 찾지 못하는 임금의 문제다. 탓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임금은 왕명을 출납하는 환관, 승정원에 기대게 된다. 관료들의 의견과 대책을 직접 반박하기엔 논리와 시간이 부족하다. 관료들의 의중을 알 방법도 없다. 임금은 환관과 승정원에게 묻고 하명할 대응책을 지시한다. 환관과 승정원은 왕의 눈과 귀가 된다. 환관과 승정원은 정리된 정보를 임금에게 전달하고, 임금의 하명을 첨삭가감하여 하달한다. 관료들은 올린 문서가 제대로 보고됐는지 알 수 없다. 받은 하명이 임금의 말인지 신뢰하지 못한다. 환관과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환관과 승정원을 물리치고, 임금께 보고하겠다는 자들이 늘기 시작한다.
환관과 승정원은 임금에 대한 위협이자 자신에 대한 위협이라 느낀다. 임금께 직언하는 자들은 임금에 의해서, 그보다 더 환관과 승정원에 의해서 배척된다. 환관과 승정원의 정보에 따라 임금은 직언하는 신하를 의심한다. 신하들은 임금에게 제대로 가 닿을 수 없음을 통탄하며 관직을 내려 놓았다.
율곡의 '만언봉사'는 채택되지 않았다. 율곡은 사직의 뜻을 밝혔다. 곧 황해도 관찰사로 발령났다. 승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율곡은 '만언봉사'를 쓰고 승정원을 떠나야했다. 관찰사에 부임한 율곡은 다음 해에 관찰사마저 그만두고 낙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