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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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이다. 기억에 관한 8편의 소설이 실려있다.
인간은 일인칭 단수다. 2인칭일수도, 3인칭일수도, 전지적일수도 없다. 일인칭 단수라는 실존의 한계를 가지고 살아 간다. 너를 이해할 수 없었고,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고, 앞날을 알 수 없었다.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일인칭 단수로 느낀 것마저 기억이 되면 잊혀져 간다. 기억나는 일들도 왜 그랬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겠지만 그 상처마저도 나는 알지 못하고, 안다고 해도 설명할 수 없다. 기억나는 이름이 점점 줄어든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름의 농도는 옅어져 간다. 모든 것이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 다 시간 덕이다.
아무런 이유없이 만나고 헤어진다. 그것이 기억이 된다. 어떤 기억은 살아남고, 어떤 기억은 사라져간다. 기억은 존재했던 것이므로, 지금은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이므로 상상할 수밖에 없다. 기억은 사실을 끼어넣든, 사실을 생략하건 허구가 끼어있게 마련이다. 허구를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억도 삶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울의 나를 보고 놀라지는 않는데, 같이 늙어가는 친구들을 보면 놀란다. SNS에 옛날 지인들의 사진을 보면 훌쩍 늙어버렸다. 골라서 올린 사진일텐데도 흠칫 놀라게 된다. 그분들이 내 사진을 보아도 그렇겠지. 아름답고 발랄했던 여자들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 조금 더 서글프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지나간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젊음도 아름다움도 시간 앞에선 금새 시시해진다. 시간은 어떤 심각한 문제도 시시하게 만들어 버린다.
하루키는 음악없는 음악감상평을 썼다. 나도 따라해봤다. 높다란 야외무대다. 누군가를 무대에 올리고, 적당한 악기를 쥐어주고, 곡을 택한다. 곡에 맞는 조명을 깔고, 무대 뒤로 내려보이는 야경을 끼워 넣는다. 테이블에 호가든 한잔이 놓여있다. 약간은 설레이는 여인이 앞에 있다. 살짝 차가운 바람이 뒤에서 분다. 여인의 머리칼이 살짝 흔들린다.
기억은 꼭 실존해야 하는가.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일인칭 단수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