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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에 기반해야 진심이 담긴다. 서슬퍼런 군부독재시절 그들은 모든 걸 걸었다. 꾸밈이 있을 수 없는 글이다. 백척간두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변해갔다. 변하지 않으면 시대가 저만치 치고 나갔다. 변하건, 변하지 않건 모두 구시대가 되었다. 시대를 통과하며 민망하게 변해갔다. 변절로 평가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영원히 혁명가로 남은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한 사람뿐이었다.
민주주의는 백성을 사랑하는 위정자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김지하)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았다. 임금도, 대지주도, 독재자도, 관료도, 군인도 백성을 사랑했다. 그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백성을 사랑했다. 그들은 훗날을 약속하며, 믿고 따라오라 눈물로 호소했다. 독재건, 보수건, 진보건 같다.
위정자가 원하는 정의따윈 관심없다. 백성은 지금,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백성이 바보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도, 그것을 해주는 사람을 원한다. 모든 인간은 바보처럼 살 권리도 있다. 합리적이고, 정의롭게 살아야한다고 강요할 순 없다.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가르키려 한다는 점이다. 가르킨다는 것은 우위에서 내려보고 있다는 뜻이다. 왕노릇 하는 것이다. 백성들은 그런 사람 필요없다.
다수결은 의결방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수의 의견도 다수의견에 비율만큼 반영되어야 한다. 다수결로 100%의사를 정한다면 소수는 다수결에 참여할 이유가 전혀 없다.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김지하 시인은 박정희 독재시절 백성을 사랑하는 위정자가는 필요없다고 선언했다. 백성을 두려워하는, 소수의 백성이라도 두려워하는 위정자가 필요한 것이다.
김지하 시인을 떠올리면 박경리 선생이 떠오른다. 유신시절 손주를 업고 구속된 사위를 면회다녔다. 외동딸의 남편이었다. 구치소로, 법정에, 교도소로 면회다녔을 선생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