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https://blog.naver.com/pyowa/223798056400
어쩌다 시작한 블로그가 20년 째다. 글을 잘 쓰고 싶었다. 리영희, 조지 오웰, 김훈, 프루스트의 문체와 묘사를 좋아한다. 안톱 체홉이나 레이먼드 카버도 좋지만 문체보다는 구성을 더 좋아한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는 오웰 산문의 대표작이다.
조지 오웰 '산문의 원칙'은 글쓰기의 간명하고, 강력한 기준이다. 블로그에 쓴 글을 고칠때도 '산문의 원칙'에 맞춰보곤 한다.
<조지오웰의 산문 원칙>
1. 익히 봐왔던 비유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2. 짧은 단어를 쓸 수 있을 때는 절대 긴 단어를 쓰지 않는다.
3. 빼도 지장이 없는 단어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뺀다.
4. 능동태를 쓸 수 있는데도 수동태를 쓰는 경우는 절대 없도록 한다.
5. 외래어나 과학용어나 전문용어는 그에 대응하는 일상어가 있다면 절대 쓰지 않는다.
6. 너무 황당한 표현을 하게 되느니 이상의 원칙을 깬다.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사람들은 이야기를 한다. 자식 이야기, 정치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친구 이야기, 세계의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에 자기가 없다. 그마저도 읽고 들었던 것을 옮겨 놓는다. 다른 사람의 문장이다. 접속사, 대명사, 외래어가 가득한 문장으로 말하곤 뿌듯해 한다. 뭉게뭉게한 전달만 있을 뿐이다.
상투적 글쓰기가 매력적인 건 그렇게 하기가 쉽다는 데 있다. '내가 보기에 ~은 이치에 맞지 않은 가정이 아니다.'라고 하는 게 '나는 ~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는 것보다 쉬운 것이다.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뭉게뭉게한 말투란 뭔가. '그 뭐랄까~', '그런 어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Sorting해가지고~', 'stance가 fix되어야~' 투의 말이다. 예전 어르신들이 한자말을 한 후에 뜻을 풀이하듯한 말이다.
언어자체는 지혜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렇더라도 생각은 언어로 한다. 언어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 문장 구조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접속사를 자주 쓴다. 문장의 순발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대명사를 자주 쓴다. 외래어를 자주쓰는 사람은 한글 어휘력이 부족한 경우다. 더 많은 경우는 무슨 생각을 해야할 지 정확히 모르겠는 사람이다. 왜 그런가. 생각이 없거나 생각하기 귀찮아서 그렇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조지 오웰의 정치적 글쓰기는 매력적이다. 오웰의 통찰은 학자적인 지혜가 아니다. 빈민으로, 반군으로, 광부로 살았다. 오웰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은 하이에크 '노예의 길'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다르다. 진보가 전체주의로 흐르는 과정을 경험으로 설명해 낸다.
'나는 왜 쓰는가'는 여전히 대단한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