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성서의 이해, 도올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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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교가 없었다. 2006년부터는 법당에 다녔다. 신자라 하기도 어려울만큼 듬성듬성 다녔다. 불교에 관한 책도 여럿 읽고, 설법도 듣고, 만다라도 구경다니곤 했다. 누군가 종교를 물어보면 불교라고 말했었다.
2010년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결혼 후에 바꾼 것이다. 개종이라 할만한 게 못 되었다. 듬성듬성 다녔던 법당이 듬성듬성 다니는 성당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거여동 성당 신부님, 수녀님께 교리 수업도 받고, 복음서 필사도 하고, 교리수업도 들었다. 가톨릭방송 강의도 필기하며 들었다. 책도 꽤 읽었는데, 그때 도올 선생의 '기독교 성서의 이해'를 읽게 되었다.
15년전의 책이지만 시원한 글과 깨끗한 논리가 일품이다. 도올의 견해에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받아들이느냐, 믿느냐의 문제는 각자가 판단하면 된다. 논리가 연결되고, 접근법이 세련되었다.
중학교때 잠깐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과 구원'에 중점을 두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당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탄생과 구원'에 대해선 익숙한데,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복음서를 보아도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특히 성장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인간 예수는 어디선가 수련했으리라. 율법을 공부하고, 역사를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깨쳤을 것이다. 율법대로 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율법을 벗어 던지고, 세상에 나아가 드디어 예수가 되었던 것이다. 율법으로부터의 해방, 운명으로부터의 해방, 선택받은 자로부터의 해방을 맞았으리라. 그리하여 병 걸린 자, 죄 지은 자, 몸 파는 여자까지 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누구의 편이냐',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묻지 않는 신이었다. 이 부분을 생각하면서 문득 고행의 틀을 벗어던진 석가모니가 떠올랐다.
교리수업을 받을 때 신약성경을 밑줄과 형광펜을 쳐가며 차례차례 읽어 나갔다. 4대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야기니 숭고하고 높은 이야기였다. 내용도 익숙했다. 뒤이어 바오로의 편지를 읽으며 크게 놀랐다. 평범한 편지글이었다. 예수의 이야기는 배경처럼 흐르고 인간 바오로가 주인공으로 말하고 있었다. 바오로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다가도 실망하고 억울해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고 당부했다.
교리수업을 하던 신부님께서 '예수님은 부활할 줄 아셨을까요'라는 질문을 하셨다. 무척 과감한 질문이었다. 이어서 신부님은 '마르코 복음에는 부활한 예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집에와 마르코 복음을 펼쳤었다. 주석서를 보면 주요 수사본은 16장 8절로 끝을 맺는다고 쓰여 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부활이 보여주지 않은 채 복음서를 끝맺었다. 너무도 놀랍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부활조차도 사실로서 확인하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세 여인,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무덤에 들어갔다가 충격 속에 나오는 장면으로 갑자기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16장 1절~8절, 이후 9절부터 20절이 있지만, 이는 2세기경 추가된 부분이다.)
(기독교 성서의 이해, 도올 김용옥)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깜짝 놀랐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마르코복음 16장 1절~8절 중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