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의 전략, 김연철
https://blog.naver.com/pyowa/223820557097
적대적 의존이 무너지고 상대의 선의에 의존하는 순간 이미 협상이 아니다. 그것은 원조다. 원조는 무언가를 팔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협상은 결국 결렬의 위험을 감내할 수 없는 자가 굴복한다. 결렬 위험의 감내는 되돌아 갔을 때 아군의 비난을 견뎌낼 수 있는 범위다.
협상의 당사자는 '적대적으로 의존'한다. 적대적 신뢰관계다. 내려서 각자의 진영에 돌아가 각자의 말을 할 때까지는 같은 배를 탄 것이다. 적이 적의 비난으로 쓰러지게 해서는 안된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적이 존재해야하므로, 적이 약해져서는 안된다. 상대가 약해지면 그만큼 협상의 동력도 약화된다.
협상의 역사를 읽으면, 현재를 살 수 밖에 없어 불안해하고, 고민했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천재도, 대장부도, 주도면밀하지도 않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협상장에 이르면 여러 순간을 만난다. 얼버무려야 할 때, 시간을 벌어야 할 때, 모호해야 할 때, 수모와 굴욕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을 때, 성취를 비밀로 해야만 할 때, 현상을 인정해야만 할 때, 여론의 지지가 불가능할 때, 성취가 파국이 될 때, 망각을 얘기할 수밖에 없을 때, 수많은 희생을 잊자고 말할 수밖에 없을 때, 정무적으로 생각하자고 할 때.
현직에 있을 때, 미국과의 협상에서 한측 협상팀으로 참여한 적이 여러번 있다. 당시 고위 관료들은 이번 협상이 결렬되면 다른 협상이나 협조에서 어려울 수 있다며 정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언제나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관료처럼 에둘러 말한다. 정무적 고려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우리 협상에서 상당부분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말이었다.
당시 협상팀장은 국장님이었다. 국장님은 협상팀에게 정무적 고려는 내가 할테니 국익만 생각하라며 지침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협상팀은 정무적 고려는 너무 막연하고 협상팀으로서는 국익만 생각하기로 방향을 잡았었다. 국장님 말씀이야 그저 격려차원의 말이거니 생각했다. 협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장님이 협상장에 오셨다. 그러더니 한 말씀 하셨다.
"협상팀은 정무적 고려를 하지 않을 겁니다. 정무적 고려는 국장인 내가 합니다. 그러니 협상팀에게 정무적인 요구를 하지 않기 바랍니다. 협상팀은 손익을 계산하며 실무적인 협상을 해 나갈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협상장을 떠나셨다. 결렬의 위험이 미측에게 전달되었다. 국장님께 정무적 요구는 전달되었겠지만, 협상팀은 협상테이블에서 큰 힘을 받았고 성과를 낼 수 있었다.
협상은 결렬의 위험을 상호 감내할 수 없는 지점에서 타결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
우리가 무엇을 반대하는지는 알기 쉽지만, 진심으로 무엇을 원하는 지는 알기 어렵다.
오래 싸우다 보면 싸움의 원인을 잊어버릴 수 있다.
부끄러운 과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협상의 전략, 김연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