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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빈 Jan 21. 2023

[결산] 2022 최고의 케이팝 트랙 1위~10위

코로나바이러스가 가져온 기나긴 터널도 점차 끝을 향해 달려가며 포스트코로나의 뉴 노멀을 앞두고 있는 2022년. 이미 하나의 문화 영역이자 종합예술로 자리잡은 K-POP 음악은 새 시대를 맞이하는 세계인들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선사해 주고 있다. '정라리의 케이팝읽기' 본 결산에서는 2022년 한 해, 즉 2022년 1월 1일부터 2022년 12월 31일 사이에 발매된 모든 K-POP 트랙 중 '베스트 트랙' 20선을 선정하였다.


* 본 글의 순위 및 칼럼은 정라리 개인이 선정하고 집필한 것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 앨범의 타이틀곡 또는 싱글된 곡만을 선정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수록곡들은 선정 대상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 '정라리의 케이팝읽기'는 음악과는 별개로 리뷰 대상 아티스트의 논란과 범죄 행위를 일체 옹호하지 않습니다.

* 본 글의 궁극적인 목적은 특정 아티스트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 혹은 비난이 아니라 케이팝 씬에 대한 깊고 넓은 관심을 촉구하고 풍부한 논의를 생산하는 것임을 유념하여 읽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2022 최고의 케이팝 트랙 1위 ~ 10위




10위

에이티즈, 'Guerrilla'


최근 대부분의 3.5~4세대 보이그룹들은 차별성 없는 콘셉트와 진부한 음악으로 오랜 침체기에 빠져 있다. 동세대 걸그룹들이 연이어 흥행작을 배출하며 새로운 황금기에 접어든 것과는 정반대다. 그러나 하나같이 강렬한 콘셉트를 택하는 보이그룹들 사이에서 유독 더 완성도 높은 음악으로 주목받으며 체급을 키워 온 에이티즈는 'Guerrilla'를 통해 엇비슷한 다른 팀들과 자신들의 수준 차이를 확실히 입증한다.


러프한 질감으로 지글대며 공격적으로 전진하는 비트의 매력이 대단하다. 위태롭게 긴장감을 높여 가며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완벽히 구현하는 사운드의 완성도는 놀라운 수준이다. 트랙의 진행에 따라 거친 기타 드라이브와 끈적한 베이스, 맑은 피아노 등 다채로운 악기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치밀한 프로덕션은 노련하게 매너리즘의 함정을 비껴나간다. 에이티즈는 지난해 가장 인상적인 음악적 성취를 거둔 보이그룹이었으며, 2023년 당신이 가장 주목해야 할 팀이다. 기획과 음악 두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일으키는 강렬한 불꽃, 그 폭발적인 질주를 목격하라.



9위

(여자)아이들, 'TOMBOY'


전 멤버 수진의 불미스러운 사건 이후 긴 공백기를 가졌던 (여자)아이들. 팀 존속 여부 자체가 흔들리며 데뷔 이후 가장 큰 위기를 맞았던 그들은 1년 뒤 [I NEVER DIE]를 외치며 돌아왔다. 타이틀곡 'TOMBOY'는 각종 음원차트 정상을 석권했고, (여자)아이들은 완벽한 복귀를 이뤄냈다. 비가 온 뒤 땅이 더욱 단단해지듯 논란 이후 차트 성적이 오히려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성도 높은 음악의 힘 덕분이다.


말할 것도 없이, 'TOMBOY'는 좋은 음악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겠다. 에너지를 가득 품은 로킹한 기타가 속도감 넘치게 질주하는 비트는 짜릿한 액션 영화처럼 생생하게 맥동하고, 전소연의 감각적인 멜로디메이킹 실력 역시 전히 빛난다. 더더기 없이 깔끔한 구성은 곡의 흡인력을 더욱 강화한다.


그러나 'TOMBOY'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가사다. '미친 X이라 말해', '사정없이 까보라고' 등 과격한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는 K-POP에서 용인될 수 있는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대상에게 거칠게 쏘아붙이고,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는 ('It's neither man nor woman') 과감한 선언으로 노래를 끝맺는다.


인상적인 것은 이 일련의 과정에서 화자가 유머러스한 애티튜드를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전소연은 '너희 어머니는 널 왕자처럼 키우셨지만, 여기는 퀸덤(queendom)'이라며 재치 있는 펀치라인으로 대상을 도발하고, '이 핑퐁 게임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 난 그냥 틱톡 영상이나 찍고 싶다'며 이 모든 상황을 마치 장난처럼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단순히 대상을 거칠게 비난하는 호전적인 태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기발랄한 유머를 병치함으로써 날선 가사에 대한 거부감을 낮추고 유쾌함과 공존하는 공격성이라는 독특한 성질을 획득하는 'TOMBOY'의 가사는 작사가로서의 전소연이 지닌 유니크한 센스를 다시금 확인케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후렴으로 들어가기 전 'Ye I'm a fucking tomboy'의 'fucking' 부분을 삐 처리하는  검열의 산물이 아니라 검열에 대한 유쾌한 조롱으로 가오, 먼지낀 질서는 모두 전복되어 (여자)아이들이라는 이름 하에 재배열된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을 두 부류로 갈라 놓은 성별이라는 개념조차도 집어던진 무정형의 자유인, '톰보이'의 등장이다.



8위

권은비, 'Glitch'


카랑카랑한 하이톤의 보컬과 유니크한 음색을 가지고 있는 권은비아이즈원의 메인보컬로 활동하며 그 기량을 입증해 보인 후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출사표를 던졌다. 스타 프로듀서 모노트리의 황현이 제작을 맡은 펑키한 스윙 장르의 데뷔곡 'Door'는 곡 자체의 준수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권은비에게 딱 맞는 옷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쨍하고 청량한 권은비의 음색과 후덥지근한 스윙 트랙이 미묘하게 엇갈리며 최고의 시너지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권은비는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음악을 비로소 찾아낸 듯하다. NCT 127의 'Superhuman' 등으로 K-POP 씬과 유효한 화학반응을 일으켜 보인 바 있는 전자음악 뮤지션 (TAK)이 프로듀싱을 맡은 'Glitch'는 감각적인 일렉트로니카 비트로 귀를 사로잡는다. 높은 음역대와 얇은 질감의 악기들을 중심으로 UK 개러지의 문법을 빌려온 세련된 사운드 프로덕션권은비의 유니크한 하이톤 보컬과 완벽한 궁합을 보인다. 이뿐 아니라 미니멀하게 곡을 이끌어 나가다 브릿지에서 돌연 폭발적인 퓨처 베이스 드롭을 쏟아내는 변칙적인 진행은 강렬한 마무리를 완성한다. 이렇게 완성도 높은 일렉트로닉 뮤직에서 여성 보컬이 두드러지게 활약하는 사례가 또 있었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인상 깊은 작품.



7위

제이홉, '방화'


방탄소년단의 제이홉(j-hope)은 이름 그대로 희망찬 에너지를 시종일관 뿜어내던 긍정적인 캐릭터였다. 그러나 깜짝 상자(Jack In The Box)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물건이 튀어나오듯, 그의 첫 정규작 타이틀 '방화'는 건조하고 위태로운 붐뱁 비트 위에서 날카롭고 거친 음색으로 분노를 쏟아낸다. 1음절의 라임으로 단순하게 구성된 벌스 초반부는 둔탁한 드럼라인과 맞물리며 강렬한 흡인력을 만들어내고, 짧게 끊어 치며 타이트하게 내뱉는 이후의 전개는 놀랍도록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다. 특히 소리를 분절시켜 얼기설기 이어 붙이며 주마등과도 같은 긴박감을 만들어내는 2절 벌스는 곡의 긴장이 최고조에 다다르며 과잉된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최고의 하이라이트.


이뿐만 아니라 서사적인 면에서 '방화'의 가치는 크다. 방탄소년단의 사가(saga)를 마무리짓는 트랙이었던 'Yet To Come'은 그들의 감정선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해 결말에 대한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방화'는 일련의 과정에서 제이홉이 느꼈던 고뇌를 과격하고 노골적인 언어로 묘사함으로써 이와 같은 갈증을 말끔히 해결해 준다. 특히 '내가 불을 켰던 건 나를 위함이었어 / 세상이 타오를 줄 누가 알았겠어' 와 같은 2절 벌스의 라인들은 그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불편할 정도로 생생히 전달한다. 이렇듯 혼돈의 화염에 휩싸여 절규하던 제이홉은 이 불을 '진압해도 재처럼 어둠의 길일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그 순간 그는 불을 견뎌낼 방법을 찾아낸다. 바로 불을 받아들이고 그 자신이 불이 되는 것이다. 이 불을 끄고 초라한 재가 될 바에는 차라리 불꽃 그 자체가 되리라. 제이홉은 '그 불을 끌지 / 더 타오를지' 라는 마지막 질문에 'Arson (방화)'를 외치고 불꽃 속으로 쓰러진다. 지금까지의 서사와 앞으로의 결단을 하드보일드한 언어로 풀어낸 본작의 가사는 방탄소년단의 모든 작업물을 통틀어서도 가장 뛰어난 수준의 스토리텔링을 보여 준다.


<Yet To Come>의 미진한 성취로 미지근한 마무리를 했던 방탄소년단의 서사시는 모든 단점이 보완된 '방화'로 화려한 제2막의 시작을 알린다. 난폭한 불꽃으로 모든 것을 불태우고 다시 처음부터. 관객들의 당혹스러운 얼굴은 이윽고 우레와 같은 박수로 변한다. 지상 최대의 케이팝 브랜드가 선보이는 압도적인 오프닝이다.



6위

뉴진스, 'Hype boy'


실험적인 프로모션 방식으로 공개된 뉴진스(NewJeans)의 'Hype boy' 여러 밈(meme)을 만들어내며 명실상부히 2022년 최고의 히트 넘버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가히 올해 가장 강력한 멜로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캐치한 후렴과, 몇 번 이고 반복해도 질리지 않을 만큼 세련되고 담백한 프로덕션은 'Hype boy'를 정말 오랜만에 나온 '국민적 케이팝 히트곡'으로 만들었다.


몽환적인 보컬 찹으로 도입부를 열고, 신비로운 신스와 뭄바톤 리듬이 빚어내는 패셔너블한 비트 위로 쿨하게 툭툭 내뱉는 벌스의 흡인력은 'Attention'보다도 뛰어나다. 하강하는 프리코러스 이후 등장하는 코러스는 보다 전형적인 모양새인데, 선명하고 직관적인 탑라인이 뉴진스 멤버들의 시원시원한 보컬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강력한 청량감을 만들어낸다.


'Attention'의 컴팩트한 구성 역시 본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벌스-코러스-벌스-코러스의 극히 간단한 구조로 트랙을 최소화하여 브릿지도 없이 쿨하게 끝내버리는 미니멀한 프로덕션은 뉴진스가 지향하는 음악관에 대한 일종의 선언과도 같다. 음원 스트리밍 시대로 접어들면서 음악의 플레이타임이 점점 줄어들어 2분대의 노래가 흔해진 최근 음악 시장의 동향을 어도어의 A&R이 인식하고 있고, 뉴진스가 그러한 트렌드를 기민하게 따라가며 케이팝 씬에서 가장 앞선 음악을 선보이는 팀이 될 것이라는 도발적인 자신감이 느껴진다. 그 어떤 부차적인 설명도 필요없이 음악만으로 자신들의 포부를 납득시키는 발칙한 신인이 등장했다.



5위

아이브, 'After LIKE'


그룹의 아이덴티티를 명시적으로 표명하지 않는 것으로 오히려 가장 선명한 아이덴티티를 획득했던 'LOVE DIVE'. 콘셉트도 장르성도 물에 비친 듯 모호해 흥미로웠던 전작의 유니크한 접근법을 180도 뒤집어, 또렷하고 직관적인 트랙 'After LIKE'를 선보이는 아이브 파격 전략은 과감함을 넘어 도발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스타쉽엔터테인먼트의 치밀한 프로덕션은 빼어난 음악적 완성도로 그 자신감의 이유를 기어코 납득시킨다.


감각적인 베이스와 건반을 필두로 다채로운 악기들이 하우스 리듬 하에 어우러지는 세련된 비트는 직관적이고 강력한 멜로디를 호화롭게 견인한다. 멜로디를 차지게 소화하는 장원영의 후렴이나 '킬링 파트'로 유명해진 가을의 프리코러스처럼 멤버들의 다양한 음색을 쉴새없이 교차시키며 귀를 즐겁게 하는 전략이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남기고 모두 덜어낸 컴팩트한 전개 덕에 이 모든 것이 뜨겁게 유효해진다.


백미는 글로리아 게이너(Gloria Gaynor)의 'I Will Survive' 샘플링한 간주로, 드라마틱한 스트링이 곡에 필요한 마지막 방점을 완벽하게 채워 준다. 스타쉽엔터테인먼트가 지금껏 제작한 모든 아이돌 그룹의 타이틀곡들 중 가장 세련된 트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After LIKE'는 전작의 성공에 전혀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그 폭발적인 잠재력을 완전히 개화시킨 뛰어난 작품이다.



4위

갓 더 비트, 'Step Back'


'케이팝 어벤져스'를 표방하며 등장한 SM엔터테인먼트의 슈퍼엠(SuperM)은 자사의 역대 보이그룹 핵심 멤버들-백현, 태민, 카이, 태용, 텐, 루카스, 마크- 로 이루어진 호화로운 라인업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2022년 새해를 여는 <SMTOWN LIVE 2022> 콘서트에서 모습을 드러낸 갓 더 비트(GOT the beat)는 그 슈퍼엠의 걸그룹 버전이라 볼 수 있는 팀으로, 보아, 소녀시대의 태연과 효연, 레드벨벳의 슬기와 웬디, 그리고 에스파의 카리나와 윈터까지 K-POP의 역사를 그대로 관통하는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인 기념비적인 프로젝트다. 그리고 갓 더 비트는 그 무게감에 걸맞는 환상적인 트랙으로 부푼 기대에 보답해 보인다.


주술적인 보이스 테마가 반복되며 기묘하고도 비장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Step Back'은 멤버들의 다채로운 음색을 교차해 등장시키며 블록버스터 무비와도 같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웬디와 윈터, 슬기와 태연이 송곳 같은 고음을 내지르는 프리코러스는 그 백미로, 후렴으로 진입하기 전 곡의 에너지를 응집시키면서 멤버들 개개인의 탁월한 보컬적 기량을 또렷이 각인시키는 전략이 돋보인다. 그러면서도 후렴에서는 조화로운 하모니가 두드러지는 합창으로 이것이 근본적으로 팀업 프로젝트임을 다시금 자각시키는 치밀함까지.


멤버들의 비중이 고르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던 슈퍼엠의 선례와는 달리, 갓 더 비트는 단 한 명의 멤버도 의미 없이 소비되지 않고 뚜렷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팀의 본질을 이해하고 최적의 구성을 취한 프로덕션의 힘이다. 다소 올드한 감성이 묻어나는 가사는 아쉽지만, 오히려 가사의 주제를 쉽고 선명하게 설정해 스타일리시하지만 난해한 비트를 조금 더 친숙하게 청취할 수 있게 하는 효과에 주목할 만하다. 이로써 'Step Back'여러 그룹의 멤버들이 하나의 새로운 팀 이루는 연합 유닛 그룹의 실효성을 입증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고, 수많은 히어로 팀업 무비 유행을 낳은 <어벤져스>가 여전히 회자되듯 갓 더 비트의 이름 역시 언젠가 새로운 조류의 시작으로 기록될 것이라 확신한다.



3위

레드벨벳, 'Feel My Rhythm'


대한민국의 아이돌 그룹 중에서 가장 세련된 팀을 꼽는다면 누가 거론될까? 적어도 레드벨벳(Red Velvet)의 이름을 빼놓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K-POP이라는 역사가 태동한 이후 이 문화가 배출해낸 가장 눈부신 음악적 성취 중 하나인 [Perfect Velvet] 앨범뿐만 아니라, 데뷔 이후 꾸준히 국내 최고 수준의 사운드 퀄리티를 선보이며 일반적인 아이돌들과 궤를 달리하는 음악적 완성도를 보여주었던 그들의 행보는 레드벨벳이라는 이름이 누구보다 스타일리쉬하게 발음될 수 있만들었다. 그리고 들은 강산이 한 번 바뀔 시간 동안에도 여전히 전혀 녹슬지 않은 독보적인 브랜드 가치를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 바로 'Feel My Rhythm'을 통해서.


재생 버튼을 누르자 마치 우아한 오페라의 서막이 올라가듯 등장하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샘플은 환상적인 첫인상을 남긴다. 발레리나 콘셉트를 내세웠던 몽환적인 티저 이미지들 천천히 떠오르려 하는 순간, 인트로가 끝나자마자 저돌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메탈릭한 비트가 모든 예상을 뒤엎는다. 에스파의 'Savage' 연상시키는 공격적인 EDM 사운드는 멤버들의 부드러운 보컬과 이질적인 듯 오묘하게 어우러지며 독특한 맛을 낸다. 특히 후렴에서는 아름다운 스트링 선율과 여린 가성 보컬이 폭발적인 전자음과 그대로 병치되는 아이러니한 구조가 나타나는데, 이는 오히려 신선한 대비감을 선사하며 'Feel My Rhythm'을 더욱 특별한 트랙으로 만든다.


'도회를 뒤집어'라는 아이린의 첫 라인은 본 곡의 전개뿐만 아니라 레드벨벳이라는 팀의 정체성을 요약하는 한 마디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단편적으로 전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코드를 결합시켜 한 번 더 비트는 작법은 레드벨벳이 가진 독보적인 음악성의 근간과도 같다. 이처럼 'Feel My Rhythm'은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화롭게 공존시키는 하이브리드한 구성을 극대화시켜 다시 한 번 탁월한 음악적 성취를 거두었다. 물론 뛰어난 짜임새의 사운드 프로덕션과 유려한 멜로디 메이킹쳐주었기에 가능했던 일. 루가 멀다 하고 새 얼굴들이 쏟아져 나오는 아이돌 시장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장 프레쉬한 팀은 9년 차에 접어든 중견 그룹 레드벨벳이다. 그들의 리듬은 결코 대체 불가능한 종류의 것을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다.



2위

아이브, 'LOVE DIVE'


아이브의 가장 큰 무기는 그들의 콘셉트를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청순', '섹시', '걸크러쉬' 등 납작한 몇 개의 단어에 갇혀버린 걸그룹 시장은 그 틀에 갇혀 더 이상의 진보를 스스로 포기해 버렸고, 비좁지만 안전한 그 감옥 속에서 안주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지난해 'ELEVEN'으로 화려한 데뷔를 이룬 스타쉽엔터테인먼트의 신인 걸그룹은 달랐다. 하나의 단어로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오묘한 정체성을 지닌 데뷔곡은 아이브가 기존의 걸그룹들과는 조금 다른 팀임을 예감케 했다. 비록 곡 자체의 완성도가 높지는 않아 아직 미완의 대기에 머물렀지만, 특정한 선명성에 매몰되지 않고도 흥미로운 트랙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아이브는 후속곡 'LOVE DIVE'로 그것을 입증해 보인다.


'LOVE DIVE'는 전작과 같이 특정한 단어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청량? 몽환? 하이틴? 물 속으로 하강하는 듯한 합창과 함께 모든 잣대들은 침잠하고 매력적인 음악만이 남는다. 제된 감정으로 내내 담담하게 가사를 뱉다 서늘한 유니즌 코러스가 쏟아지는 구성이 사하는 감정은 낯설고 기묘하지만, 치밀하게 다듬어진 세련된 사운드 프로덕션은 아이브가 선보이는 낯선 바다로 대중과 리스너 모두를 이끈다. 이로써 탄탄한 완성도의 음악을 기반으로 시도된 아이브의 실험은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상당한 호평을 이끌어낼 만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아이브가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걸그룹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스타쉽은 아이브를 통해 걸그룹 시장의 스테레오타입들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채로 대중을 설득해내는 놀라운 일을 성공시켰으며, 이는 K-POP의 또다른 확장성을 발견할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는 성과다. 그리고 그 새로운 여로는 낯설지만 가슴 뛰는 향기를 풍긴다.  사랑에 빠져드는 일처럼.



1

뉴진스, 'Attention'


하이브 레이블(HYBE LABELS)  기획사 어도어(ADOR)가 야심차게 선보이는 신인 걸그룹 뉴진스(NewJeans)는 데뷔 음원 발매에 앞서 멤버별로 다른 스토리가 담긴 4종의 MV를 우선 공개하는 등 파격적인 프로모션 전략으로 단숨에 시선을 끌어모았다. 케이팝이 낳은 가장 눈부신 성취 중 하나인 [Pink Tape]를 비롯해 SM엔터테인먼트 디렉터 재임 시절 수많은 걸작들을 만들어내며 2010년대의 케이팝을 견인했던 민희진이 제작을 맡은 만큼 대중의 기대는 끝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그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는 놀라운 완성도의 데뷔작 [New Jeans]는 정교하고 치밀한 프로덕션으로 신인의 첫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청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데뷔 앨범의 첫 번째 트랙 'Attention' 은 갓 더 비트(GOT the beat)의 'Step Back'을 연상시키는 유니즌 코러스 보컬 샘플과 클랩의 조합으로 포문을 연다. 그러나 이윽고 이 날카로운 샘플 위로 산뜻한 피아노가 사뿐히 내려앉으며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된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머리를 세게 맞은 듯 멍해졌다. 음악을 많이 듣다 보면 클리셰라는 것이 싫어도 귀에 익기 마련이고, 본질적으로 대중가요인 케이팝의 특성상 그런 클리셰를 활용하는 것도 중요한지라 케이팝 음악을 듣다 보면 다음 마디에 어떤 악기가 나와서 어떤 코드로 진행되겠구나 하는 것이 대충 예상이 가고 실제로도 그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Attention' 역시 마찬가지로, 첫 마디를 듣고 뻔한 EDM 트랙이 전개될 거라고 무심코 생각해 버렸다. 그러나 그 예상을 비웃듯 반 박자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멜로우한 건반과 반짝이는 SFX는 놀랍게도 댄서블한 보컬 샘플과 부드럽게 결합하며 독특하고 세련된 비트를 만들어낸다. 이 도입부를 듣고, 결코 가벼이 넘길 작품이 아니라는 예감에 귀를 집중했다.



또다시 귀를 잡아끄는 구간은 여유로운 벌스와 짧은 프리코러스를 지나 등장하는 코러스다. 적당히 박자를 통통 튕기며 유지해온 텐션을 폭발시켜야 할 순간에 오히려 얇고 유려한 가성으로 부드러이 뻗어 나가는 후렴은 극대화된 낙차가 돋보이는 최근 케이팝 프로덕션의 동향을 뉴진스의 방식대로 재해석하여 다시 한 번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다. 그 어떤 케이팝 작품에서도 들어볼 수 없었던 청량하고 상쾌한 감흥을 선사하는 코러스다.


이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케이팝이라면 브릿지가 등장해야 할 구간에 대신 코러스를 한 번 더 반복해 넣고 심플한 아우트로로 마무리하는 컴팩트한 구성 역시 눈에 띈다. 'Attention'이 몇 번을 반복해 재생해도 질리지 않는 것은 이처럼 군더더기를 전부 제거하고 담백한 맛으로 가득 채워넣은 정교한 기획 덕분. 가히 치밀하고 독보적이다.



뉴진스가 씬에 모습을 드러낸 뒤로 케이팝 팬들은 뉴진스를 아직 이르지만 유력한 신인상 후보로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의 신인? 더 크게 생각해 보라. 필자는 [New Jeans]를 케이팝 역사상 최고의 데뷔 앨범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이 정도로 '이미 완성되어' 나타난 루키는 없었다. 풋풋함은 느껴지지만, 모자람은 느껴지지 않는다.


'Attention'처럼 아이돌, 프로듀서, 디렉터가 모두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며 절정의 합을 선보였던 데뷔가 일찍이 있었는가? 케이팝에 새로운 태풍의 눈이 등장했다는 본능적인 예감에 설렘을 감추기 어렵다. 일천한 경력을 걸고 하건대, 필자는 뉴진스의 성공을 감히 '확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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