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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빈 Jul 11. 2022

영웅에서 소년으로: 방탄소년단 <Yet To Come>





미국의 래퍼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는 힙합 역사상 가장 걸출한 앨범들 중 하나인 [good kid, m.A.A.d city], [To Pimp A Butterfly], [DAMN.]을 연달아 발매하며 일약 힙합 씬의 왕좌에 올랐고, 그의 독보적인 리릭시즘과 철학은 그를 흑인 문화와 정서를 관통하는 거대한 상징으로 만들었다. 현대 흑인 커뮤니티 내에서 그는 단순한 유명 래퍼가 아니라, 고귀한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위대한 '블랙 메시아(Black Messiah)'였다.


그러나 켄드릭은 다섯 번째 정규앨범 [Mr. Morale & The Big Steppers]를 통해 'Sorry I didn't save the world my friend, I was too busy buildin' mine again, I choose me I'm sorry (세상을 구하지 못해서 미안해, 친구. 난 내 걸 쌓기에도 바빴는걸. 나는 나를 선택할 거야, 미안해)'라 읊조리며 흑인 사회의 영웅적인 대변자로서의 삶이 아닌, 자신의 신념을 좇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택한다. 켄드릭 라마라는 이름이 흑인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와 위상을 고려하면, 두 귀로 듣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가량이 지나고, 방탄소년단활동 잠정 중단을 발표했다. 쉴 틈 없이 달려온 지난 시간들 동안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숙성시킬 여유가 없어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듯하다고 토로한 멤버들의 라이브 방송 이후 거대한 충격에 휩쓸린 것은 K-POP 팬들뿐만이 아니었다. 어느덧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된 그들의 활동 중지 소식은 연예면을 넘어 사회면에서까지 다루어졌고, 이것을 단순히 한 인기 아이돌 그룹과의 아쉬운 작별 정도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이는 어째서인가? 앞서 언급한 켄드릭 라마와 같이, 방탄소년단 역시 황인종의 역사 내에서 뮤지션 이상의 거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물론 켄드릭과 방탄소년단의 위상을 직접적으로 동치시키는 것은 어폐가 있겠지만, 서구 사회에서 언제나 들러리 역할에 불과했던 황인종이 자신의 정체성을 오롯이 인정받으며 메인스트림을 거머쥔 방탄소년단의 성과는 그야말로 전례 없는 인종적 쾌거를 안겨 주었으며 UN 총회에서 미래 세대를 위해 연설하고 흑인 인종차별 반대 운동 'Black Lives Matter' 기금에 100만 달러를 기부하는 등 차별 없는 평등한 세계를 위해 적극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행보를 고려할 때 방탄소년단 역시 이미 그 자체로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항상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시대의 본질을 꿰뚫었던 작가주의 뮤지션 켄드릭과는 달리 평범한 아이돌 그룹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던 방탄소년단은 그 마음가짐 측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었. 단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좋아 무대에 오르기를 꿈꿨던 소년들에게 세계 사회의 아이콘이라는 왕관은 너무나도 무거웠고, 애당초 바랐던 바도 아니었다.



때문에 방탄소년단은 높아진 입지를 영광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감 역시 조심스럽게 토로해 왔는데, 빌보드 핫100 차트의 최상단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순간 발매했던 '작은 것들을 위한 시'는 그 영광과 부담의 불편한 동침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킨 좋은 예시이다.



상상해본 적도 없었던 커다란 성공을 마주 방탄소년단 '툭 까놓고 말할게 /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기도 했어 / 때론 도망치게 해달라며 기도했어' 라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뇌 끝에 성공의 본질이 '이카루스의 날개를 건네준 너'에게 있음을 깨달아 내고 비로소 '작은 것'들을 위한 노래를 부른다. ('네가 내게 줬던 두 날개로 / 이제 여긴 너무 높아 / 난 내 눈에 널 맞추고 싶어')


이 일련의 서사는 사유의 과정을 간결한 문체로 담아낸 가사를 통해 트랙 내에서 자연스럽게 청자를 설득시킨다. 급작스레 올라 버린 영웅의 자리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자각과 직시의 과정을 통해 겸손과 헌신의 결말을 도출해내는 탄탄한 기승전결 구조로 짜여진 '작은 것들을 위한 시'는 그 자체로 훌륭한 완결성 보여 준다.



그로부터 3년 후, 활동 중지 발표와 함께 공개된 앤솔러지 앨범의 타이틀곡 'Yet To Come' 전작 '작은 것들을 위한 시'와 상당히 유사한 논점에서 출발한다. 는 '다들 언제부턴가 / 말하네 우릴 최고라고 / 이젠 무겁기만 해'라며 다시 한 번 최고의 자리에서 느끼는 부담감을 토로하고, 진은 '너의 마음 속 깊은 어딘가 / 여전한 소년이 있어' 라며 변해버린 위치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순수하고 어린 마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Yet To Come'의 사유는 그 지점에서 멈춰 버린다. 성숙을 요구하는 현실 속에서 미성숙한 자아로 살아가는 데에서 나오는 괴리감을 실컷 토로해 놓고, 그 괴리의 원인과 본질을 찾는 과정은 생략한 채 '자 이제 시작이야 / the best yet to come' 이라며 공익광고스러운 결론을 대뜸 내놓는다. 화자가 괴로움을 어떻게 긍정적인 포부로 승화시켰는지에 대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설명이 부재한다. 출발과 도착만을 서술할 뿐, 그 사이의 여정이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무작정 희망적인 말을 늘어놓으며 해피엔딩으로 끝맺으려 해도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합리적인 서사가 부족해 곡의 메시지에 몰입하기가 어렵다. 억지로 도달한 그 결론 역시 약자에 대한 헌신이나 성공에의 환원이 아닌, 밝은 미래에 대한 평면적인 예찬에 불과하다. 때문에 이 노래에는 위로도, 극복도, 깨달음도 없다. 오직 원론적인 교훈성 메시지만을 공허하게 되뇌일 뿐이다.



영웅이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기를 택하는 것은 평범한 삶에서 영웅이 되는 것보다 더 깊은 고뇌를 수반하고, 그것을 타자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훨씬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켄드릭 라마는 18곡에 달하는 정규 앨범을 통해 그 고통스럽고 힘겨운 과정을 생생하고 처절하게 담아냈고, 그 결과 리스너들에게 자신의 선택을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방탄소년단은 단 한 곡-그마저도 서사가 충분하지 못한-만을 통해 모든 과정을 얼버무리고자 하는 만용에 가까운 실수로 용두사미의 결과를 낳았다. 비슷한 결의 상징성을 가진 두 아티스트지만 자신의 선택을 마주하는 성숙함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이미 '작은 것들을 위한 시'에서 ''라는 대상을 중심으로 유려한 극복의 서사를 보여준 바 있는 방탄소년단이기에 'Yet To Come'의 피상적인 사유와 헐거운 짜임새는 더욱 아쉬울 뿐이다. 차라리 지쳤다고, 힘들다고,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며 위로를 청했다면 더 나았을까. 지켜보는 눈들이 너무 많은 탓에 부자연스런 결말을 끌어내야 했던 그들의 미소가 조금 서글프게 느껴진다.



결국 'Yet To Come'의 미진한 성취뿐만 아니라 방탄소년단이라는 그룹이 활동 중지를 선언하게 된 까닭은 근본적으로 모든 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야만 하는 '전체이용가 문화'로서의 케이팝의 근본적 속성 때문이다. 언제나 밝고 건강하기만을 요구받는 아이돌들은 내면의 아픔을 쉽사리 꺼내 보일 수 없고, 혹여나 잠시 드러낸다고 해도 억지로 웃으며 '나는 괜찮다'고 끝맺어야 한다. 그 때문에 'Yet To Come'은 공허한 외침으로 가득한 서글픈 미완성작이 되어야 했, 방탄소년단은 위대한 여정에 쉼표를 놓아야만 했다. 케이팝뿐만 아니라 어쩌면 대한민국 사회 전체의 곪아버린 병폐를 예감케 하는, 슬프고 허망한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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