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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빈 Aug 02. 2022

불꽃과 재의 노래 : 제이홉 <방화>


방탄소년단의 제이홉(j-hope)은 이름 그대로 희망차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시종일관 뿜어내는 유니크한 캐릭터였다. 세련된 아프로비트 리듬에 회고적인 가사를 수놓은 정규앨범 [Map of the Soul: 7]의 솔로 수록곡 'Outro: Ego'는 그 이미지를 깊숙히 각인시킨 곡으로, 제이홉이 방탄소년단의 활동 중단 이후 처음으로 솔로로 앨범을 발매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누구나 떠올렸을 대표적인 트랙이다. 그러나 화려한 라인업의 리스닝 파티 이후 공개된 정규앨범 [Jack In The Box]의 타이틀곡 '방화'는,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완전히 다른 제이홉의 세계로 청자를 초대한다.



깜짝 상자(Jack In The Box)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물건이 튀어나오듯, 모두의 예측을 뒤엎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건 건조하고 위태로운 붐뱁 비트다. 음산한 베이스가 자글대는 가운데 제이홉은 날카롭고 거친 음색으로 방화를 예고한다.


1음절의 라임으로 단순하게 구성된 벌스 초반부는 둔탁한 드럼라인과 맞물리며 강렬한 흡인력을 만들어내고, 짧게 끊어 치며 타이트하게 내뱉는 이후의 전개는 놀랍도록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다. 특히 소리를 분절시켜 얼기설기 이어 붙이며 주마등과도 같은 긴박감을 만들어내는 2절 벌스는 곡의 긴장이 최고조에 다다르며 과잉된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최고의 하이라이트.



사실 '방화'에서 제이홉은 여타 래퍼들처럼 복잡하고 화려한 플로우를 구사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은 짧고 간단한 정박 플로우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조적으로 그리 신선한 부분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본작에서 그의 랩스킬이 유독 돋보이는 것은 바로  때문이다.


제이홉은 낮은 톤으로 목소리를 긁으며 랩을 하다가도 나플라(nafla)를 연상시키는 '삑사리 톤'으로 돌변하고, 때로는 서태지를 닮은 익살맞은 하이톤으로 훅을 소화하기도 한다. 뛰어난 곡 해석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활용하는 법을 완전히 터득한 듯한 그는 다채로운 톤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며 청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멋을 위해 목을 긁어대는 수많은 아이돌 래퍼들의 피로한 발성법은 프로 래퍼와 아이돌 래퍼의 결정적인 차이점으로 자주 거론된다. 단순한 루프 위에서 랩을 뱉는 힙합 음악의 특성 상, 자신의 톤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것은 래퍼로서 모름지기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아이돌 래퍼인 송민호가 인위적인 로우톤을 버리고 자신에게 가장 편하고 어울리는 하이톤을 찾은 시점과 래퍼로서의 역량이 본격적으로 널리 인정받게 된 시점이 일치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처럼 제이홉 역시 본인이 꾸준히 애정을 드러내 온 바 있듯 힙합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스핏(spit)을 선보였고, 이는 본작을 아이돌 래퍼의 한계를 딛고 이루어낸 장르음악으로서의 가슴 뛰는 성취로 만들었다. 힙합 그룹으로 시작했지만 도리어 랩이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받았던 방탄소년단이기에 이는 더욱 의미 있는 성과다.



이뿐만 아니라 서사적인 면에서 '방화'의 가치는 크다. 방탄소년단의 사가(saga)를 마무리짓는 트랙이었던 'Yet To Come'은 그들의 감정선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해 결말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방화'는 일련의 과정에서 제이홉이 느꼈던 고뇌를 과격하고 노골적인 언어로 묘사함으로써 이와 같은 갈증을 말끔히 해결해 준다. 특히 '내가 불을 켰던 건 나를 위함이었어 / 세상이 타오를 줄 누가 알았겠어' 와 같은 2절 벌스의 라인들은 그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불편할 정도로 생생히 전달한다.



이렇듯 혼돈의 화염에 휩싸여 절규하던 제이홉은 이 불을 '진압해도 재처럼 어둠의 길일 거'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그 순간 그는 불을 견뎌낼 방법을 찾는다. 바로 불을 받아들이고 그 자신이 불이 되는 것이다. 이 불을 끄고 초라한 재가 될 바에는 차라리 불꽃 그 자체가 되리라. 제이홉은 '그 불을 끌지 / 더 타오를지' 라는 마지막 질문에 'Arson (방화)'를 외치고 불꽃 속으로 쓰러진다. 지금까지의 서사와 앞으로의 결단을 하드보일드한 언어로 풀어낸 본작의 가사는 방탄소년단의 모든 작업물을 통틀어서도 가장 뛰어난 수준의 스토리텔링을 보여 준다.



<Yet To Come>의 미진한 성취로 미지근한 마무리를 했던 방탄소년단의 서사시는 모든 단점이 보완된 '방화'로 화려한 제2막의 시작을 알린다. 난폭한 불꽃으로 모든 것을 불태우고 다시 처음부터. 관객들의 당혹스러운 얼굴은 이윽고 우레와 같은 박수로 변한다. 지상 최대의 케이팝 브랜드가 선보이는 압도적인 오프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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