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 레이블(HYBE LABELS)의 기획사 어도어(ADOR)가 야심차게 선보이는 신인 걸그룹 뉴진스(NewJeans)는 데뷔 음원 발매에 앞서 멤버별로 다른 스토리가 담긴 4종의 MV를 우선 공개하는 등 파격적인 프로모션 전략으로 단숨에 시선을 끌어모았다.
케이팝이 낳은 가장 눈부신 성취 중 하나인 [Pink Tape]를 비롯해 SM엔터테인먼트 디렉터 재임 시절 수많은 걸작들을 만들어내며 2010년대의 케이팝을 견인했던 민희진이 제작을 맡은 만큼 대중의 기대는 끝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그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는 놀라운 완성도의 데뷔작 [New Jeans]는 정교하고 치밀한 프로덕션으로 신인의 첫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청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첫 번째 트랙 'Attention' 의 도입부는 갓 더 비트(GOT the beat)의 'Step Back'을 연상시키는 유니즌 코러스 보컬 샘플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윽고 이 날카로운 샘플 위로 산뜻한 피아노가 사뿐히 내려앉으며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된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머리를 세게 맞은 듯 멍해졌다. 음악을 많이 듣다 보면 클리셰라는 것이 싫어도 귀에 익기 마련이고, 본질적으로 대중가요인 케이팝의 특성상 그런 클리셰를 활용하는 것도 중요한지라 케이팝 음악을 듣다 보면 다음 마디에 어떤 악기가 나와서 어떤 코드로 진행되겠구나 하는 것이 대충 예상이 가고 실제로도 그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Attention' 역시 마찬가지로, 첫 마디를 듣고 뻔한 EDM 트랙이 전개될 거라고 무심코 생각해 버렸다. 그러나 그 예상을 비웃듯 반 박자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멜로우한 건반과 반짝이는 SFX는 신기하게도 댄서블한 보컬 샘플과 부드럽게 결합하며 독특하고 세련된 비트를 만들어낸다. 이 도입부를 듣고, 결코 가벼이 넘길 작품이 아니라는 예감에 귀를 집중했다.
또다시 귀를 잡아끄는 구간은 여유로운 벌스와 짧은 프리코러스를 지나 등장하는 코러스다. 적당히 박자를 통통 튕기며 유지해온 텐션을 폭발시켜야 할 순간에 오히려 얇고 유려한 가성으로 부드러이 뻗어 나가는 후렴은 극대화된 낙차가 돋보이는 최근 케이팝 프로덕션의 동향을 뉴진스의 방식대로 재해석하여 다시 한 번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다. 그 어떤 케이팝 작품에서도 들어볼 수 없었던 청량하고 상쾌한 감흥을 선사하는 코러스다.
이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케이팝이라면 브릿지가 등장해야 할 구간에 대신 코러스를 한 번 더 반복해 넣고 심플한 아우트로로 마무리하는 컴팩트한 구성 역시 눈에 띈다. 'Attention'이 몇 번을 반복해 재생해도 질리지 않는 것은 이처럼 군더더기를 전부 제거하고 담백한 맛으로 가득 채워넣은 정교한 기획 덕분.노래 제목처럼 리스너들의 관심을 모두 끌어모으는 독보적인 작품이다.
이어 실험적인 프로모션 방식으로 공개된 두 번째 트랙 'Hype boy'는몽환적인 보컬 찹으로 도입부를 연다. 신비로운 신스와 뭄바톤 리듬이 빚어내는 패셔너블한 비트 위로 쿨하게 툭툭 내뱉는 벌스의 흡인력은 'Attention'보다도 뛰어나다. 하강하는 프리코러스 이후 등장하는 코러스는 보다 전형적인 모양새인데, 선명하고 직관적인 탑라인이 뉴진스 멤버들의 시원시원한 보컬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며강력한 청량감을 만들어낸다.
'Attention'의 컴팩트한 구성은 'Hype boy'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벌스-코러스-벌스-코러스의 극히 간단한 구조로 트랙을 최소화하여 브릿지도 없이 쿨하게 끝내버리는 미니멀한 프로덕션은 뉴진스가 지향하는 음악관에 대한 일종의 선언과도 같다. 음원 스트리밍 시대로 접어들면서 음악의 플레이타임이 점점 줄어들어 2분대의 노래가 흔해진 최근 음악 시장의 동향을 어도어의 A&R이 인식하고 있고, 뉴진스가 그러한 트렌드를 기민하게 따라가며 케이팝 씬에서 가장 앞선 음악을 선보이는 팀이 될 것이라는 도발적인 자신감이 느껴진다. 그 어떤 부차적인 설명도 필요없이 음악만으로 자신들의 포부를 납득시키는 발칙한 신인이 등장했다.
트리플 타이틀의 마지막 트랙 'Cookie'는 앞선 두 곡과는 다소 질감이 다른 곡이지만, 뉴진스 특유의 과감하고 신선한 프로덕션은 그대로다. 가사를 길게 늘여 부르며 예상을 조금씩 빗겨나가는 초반부의 전개는 소소한 즐거움을 주며, 출렁이는 신스 중간중간 유머러스하게 카우벨이 튀어나오는 비트는 미니멀하면서도 세련된 만듦새를 자랑한다.중반부에는 저지클럽 풍의 스타카토 리듬 변주, 후반부에는 현란한 하이햇 연주로 곡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영민한 편곡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레드벨벳'Bad Boy'의 뉴진스적 해석이랄까.
대미를 장식하는 트랙 'Hurt'는 걸그룹 앨범의 수록곡에 늘상 들어가는 멜로우한 알앤비 넘버지만,뉴진스 멤버들의 감미로운 음색이 어쿠스틱한 비트와 우수한 궁합을 보인다. 앞선 트랙들의 화려한 사운드에 가려졌던 멤버들의 보컬적 역량을 놓치지 않고 조명해 주는영리한 전략이다.
이처럼 [New Jeans]의 사운드는 국내 최고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주면서도 기존의 케이팝과는 어딘가 다른 프레쉬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민희진이 케이팝 프로듀서가 아닌 외부 인물에게 본 앨범을 온전히 맡겼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이센스와 빈지노 등이 소속된 힙합 음반사 BANA(Beasts And Natives Alike)의 프로듀서 250과 FRNK다.
대중에게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이름인 250은 래퍼 이센스(E-Sens)의 걸작 싱글 '비행'의 프로듀서로 힙합 씬에 이름을 알렸고, 올해(2022년) 한국의 댄스음악인 뽕짝과 현대 일렉트로니카를 세련되게 크로스오버하며 독보적인 작품성과 실험성을 인정받은 정규 앨범 [뽕]을 발매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케이팝 씬과는 2014년 f(x)의 '4 Walls'를 리믹스하며 첫 접점을 가졌고, 이후 보아, NCT 127, 있지 등과 작업하며 서서히 씬 안으로 들어오고 있던 프로듀서다.
이처럼 힙합/일렉트로니카 프로듀서로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상급 실력이지만 케이팝 프로듀서로서는 아직 유효성이 확실히 검증되지 않았던 그에게 민희진은 뉴진스의 앨범 4곡 중 3곡('Attention', 'Hype boy', 'Hurt')을 맡기며 전권을 쥐어주었다. 국내에서 가장 세련된 사운드를 뽑는 프로듀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천부적인 편곡 실력과, 케이팝 씬의 주된 양분인 일렉트로니카와 힙합 두 장르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날카로운 감각으로부터 250이 케이팝에 가장 적합한 프로듀서가 될 자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본 것이다. 그 결과, 민희진의 도박수는 멋지게 성공했고 오래 기억될 만한 멋진 작품이 탄생했다. 이번 앨범의 진짜 주인공이 사실상 뉴진스가 아니라 250이라 봐도 무방한 이유다.
250이 종횡무진 재능을 발산한 가운데, FRNK 역시 박진수라는 이름으로 'Cookie'의 프로듀싱을 맡았다. FRNK는 래퍼 김심야와 함께 결성한 익스페리멘탈 힙합 팀 XXX의 앨범 [LANGUAGE]로 국내 힙합 씬에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등 이미 힙합 씬에서 실험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겸비한 국내 최고 수준의 프로듀서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다. 비록 'Cookie'에서는 특유의 전위적인 실험성을 자제하며 본모습(?)을 숨기긴 했지만, 세련되게 다듬은 악기들을 토대로 현란한 변주를 가미하며 밀도 높은 비트를 만들어내는 그의 감각은 케이팝에도 어색함 없이 녹아들어 재미있는 트랙을 만들어냈다.
뉴진스가 씬에 모습을 드러낸 뒤로 케이팝 팬들은 뉴진스를 아직 이르지만 유력한 신인상 후보로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의 신인? 더 크게 생각해 보라. 필자는 [New Jeans]를 케이팝 역사상 최고의 데뷔 앨범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이 정도로 '이미 완성되어' 나타난 루키는 없었다. 풋풋함은 느껴지지만, 모자람은 느껴지지 않는다.
[New Jeans]처럼 아이돌, 프로듀서, 디렉터가 모두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며 절정의 합을 선보였던 앨범이일찍이있었는가?케이팝에 새로운 태풍의 눈이 등장했다는 본능적인 예감에 설렘을 감추기 어렵다.일천한 경력을 걸고 말하건대, 필자는 뉴진스의 성공을 감히 '확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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