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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빈 Sep 30. 2022

엔믹스(NMIXX)와 믹스팝의 미래

JYP 신인 걸그룹 엔믹스의 행보에 대한 논평




1. 글을 열며


수많은 케이팝 기획사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걸그룹 명가'로 일컬어지는 JYP엔터테인먼트는 역사상 가장 히트한 케이팝 걸그룹 트랙이라고 해도 무방한 'Tell Me'로 대표되는 원더걸스의 전성기를 시작으로, 'Bad Girl Good Girl'로 2010년 연간 1위를 차지한 미쓰에이(Miss A), 단순한 인기를 넘어 걸그룹 시장의 경제 규모 자체를 확장시킨 트와이스(TWICE), 그리고 흥행 불패 신화를 이어가며 데뷔곡 '달라달라'로 화려하게 등장한 있지(ITZY)에 이르기까지 15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그들이 대한민국 최고의 걸그룹 제작 역량을 지닌 기획사임을 입증해 왔다.



케이팝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 황금의 계보는 2022년 2월 22일 신인 걸그룹 엔믹스(NMIXX)에 의해 이어졌다. 그러나 SQU4D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JYP엔터테인먼트 아티스트 4본부야심차게 신설되며 단독 프로듀싱을 맡은 만큼 기존의 JYP 걸그룹들과는 음악부터 프로모션 방식까지 사뭇 다른 모양새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 엔믹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2. 엔믹스의 프리-데뷔



엔믹스가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데뷔 반 년 전인 2021년 7월이었다. 팀명, 멤버, 콘셉트 등 아무 것도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데뷔 음반을 예약 판매하는 파격적인 프로모션을 기억한다. 블라인드 패키지(BLIND PACKAGE)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사실상 소비자에게 사전 정보 없이 JYP라는 브랜드만을 믿고 투자하기를 요구하는 발칙한 상술이었다.



그러나 브랜드 파워를 입증하듯 이 호기로운 출사표는 4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고, 데뷔에 앞서 멤버들의 커버 무대를 유튜브에 차례차례 공개하는 퀄리파잉(QUALIFYING) 프로모션은 멤버들의 탄탄한 실력을 효과적으로 조명하며 평가를 반전시켰다.



3. '믹스팝'이란 게 뭔데요?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엔믹스만의 장르라며 홍보했던 '믹스팝'이라는 음악적 노선이었다. 사실 믹스팝이란 것은 다채로운 섹션을 이어붙여 하나의 곡으로 만드는 작법을 보기 좋게 이름붙인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작법은 주로 해외 힙합 씬에서 흔하게 사용되는데, 트래비스 스캇(Travis Scott)의 메가히트 넘버 'SICKO MODE', 퓨처(Future)의 'Life Is Good', 프랭크 오션(Frank Ocean)의 'Nights'가 대표적인 예시다.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나 프레디 깁스(Freddie Gibbs)와 같은 작가주의 래퍼들은 비트체인지를 통해 몰입감을 유도하고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선보이기도 한다.



케이팝의 영역에서 이러한 작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운용한 대표작은 에스파(aespa)의 'Next Level'일 것이다.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사운드가 다채롭게 변화하며 마치 시청각 매체와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Next Level'의 입체적인 프로덕션은 상업적/비평적으로 모두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에스파의 성공 이후 이러한 '믹스팝'의 잠재력을 꿰뚫어보지 못한 기획자는 없을 것이다.


때문에 엔믹스가 팀명에서까지 '믹스'를 내세우며 자신 있게 믹스팝을 천명했던 것은 사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믹스팝은 세계적 트렌드이고, 이미 상업적인 면과 비평적인 면 모두에서 유효함이 입증되었으니까.



4. 믹스팝이 상용화되지 못한 이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믹스팝이 케이팝 씬에서 쉽사리 시도되지 못했던 데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로, 경제적 효율성이 다. 단순히 생각해 보아도 여러 곡을 사들여 한 곡으로 합쳐서 발매하는 방식은 훨씬 더 많은 비용이 요구될 수밖에 없고, 그 곡들을 자연스레 믹스하기 위한 추가적인 편곡 작업도 필요하니 이만저만 부담되는 게 아니다. 단적으로 상술한 'SICKO MODE'만 보아도 무려 30명에 육박하는 송라이터들이 달라붙어 만든 거대한 합작 프로젝트이니 풍부한 자본력을 보유한 대형 기획사가 아니고서야 엄두를 내기 어렵다.


때문에, 둘째로, 음악의 퀄리티를 담보하기 어렵다. 이질적인 여러 곡들을 자연스럽게 이어붙이는 것은 높은 수준의 프로듀서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투자 비용은 막대한데 리스크는 오히려 더 높으니, 자본이 받쳐 주는 대형 기획사들조차도 굳이 시도할 이유가 없는 모험이다. 메타버스와 같은 파격적 콘셉트를 선보이며 혁신을 모토로 삼았던 에스파 같은 진보적인 프로젝트가 아니고서야 일반적인 아이돌로서는 트랙을 소화하기도 까다롭다.



무엇보다도, 케이팝은 이미 본질적으로 믹스팝이다. 일렉트로닉 뮤직, 힙합, 알앤비, 발라드 등 다채로운 장르들이 하나의 목적 아래 어우러져 공존하는 케이팝이라는 장르는 그 본질적인 확장성으로 인해 가장 특별한 음악으로 거듭났다. 케이팝이 무엇인지 정의할 때, '다양한 음악의 갈래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하이브리드함'이 가장 먼저 거론되어야 할 정도로 이 속성은 케이팝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가 아는 수많은 케이팝은 이미 믹스팝이라 할 수 있다. 섹션별로 악기와 리듬이 쉴 새 없이 변주되는 구조는 이미 현대 케이팝의 필수 공식과도 같으며, 오히려 한 가지 테마만으로 우직하게 끌고 나가는 곡을 찾아보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다. 당장 레드벨벳 'Feel My Rhythm'의 벌스와 코러스, 브릿지의 트랙 구성이 얼마나 이질적인지 떠올려 보라.



때문에, 케이팝의 역동성에 이미 너무 익숙해져 버린 대중들 귀에 믹스팝이라는 용어를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완전히 파격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Next Level'처럼 흡인력 넘치는 스토리텔링으로 청자를 곡의 진행에 몰입시킨 후 비트체인지를 마치 영화의 반전 장면처럼 인상깊게 각인시키거나, 아니면 정말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완전히 이질적인 섹션들을 이어붙임으로써 충격을 주거나. 엔믹스의 선택은 후자였다.



5. 성공 혹은 실패, 데뷔작 'O.O'



그런 의미에서 데뷔곡 'O.O'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믹스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둡고 공격적인 1절의 베일리 펑크 파트와 밝고 화사한 2절의 팝 락 파트는 완전히 무관하며 이질적이다. 이 두 개의 섹션을 이어붙일 발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O.O'는 믹스팝이 주는 문법적 충격을 완벽히 구현한 작품이다. 심지어 두 섹션은 개별적으로 보아도 굉장히 매력적이며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트랙이 주는 버라이어티한 즐거움과는 별개로, 섹션 간의 이음새가 부자연스럽고 디렉팅이 정돈되지 못한 탓에 'O.O'는 첫 시도치고는 만족스러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다소간의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가장 눈에 띄는 약점은 엔믹스가 스토리텔링을 위해 믹스팝을 활용하는 게 아니라, 믹스팝을 위해 스토리텔링이라는 수단을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Next Level'의 프로덕션은 세계관의 흐름을 청각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다이나믹한 비트체인지로 표현해 청자를 납득시켰다. 말하자면 왜 그러한 작법을 택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음악 내에서 명확히 설명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O.O'는  이유가 불명확하다. 어째서 엔믹스의 데뷔곡이 믹스팝의 형태를 취했어야 하는가? 단순히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라면, JYP는 'Next Level'의 성공 요인을 너무 피상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엔믹스가 가진 세계관이 가사에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알겠지만, 지나치게 불친절하다. 가사가 지극히 추상적으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잦은 보컬 교체와 과도한 한영혼용 탓에 혼란이 배가 된다. 단지 믹스팝을 시도하기 위한 명으로 세계관이니 이야기를 끌어온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통일감 있는 스토리텔링이 부재하는 믹스팝은 이윽고 난잡해질 뿐이다. 대중의 반응이 시들했던 것도 이 점에서 기인한다.



6. 진보 아닌 퇴보, 후속작 'DICE'



따라서 엔믹스는 두 번째 싱글 'DICE'에서 반드시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지난 9월 19일 공개된 'DICE'는 오히려 데뷔작보다도 거의 모든 면에서 한 걸음 퇴보한 완성도로 실망만을 안긴다. 적대자의 방해에 맞서 MIXXTOPIA로 나아가는 모험 이야기는 앨범 소개 문구에 줄글로 설명될 뿐, 음악 내부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가사의 몇몇 단어들로 단지 진행 상황을 조금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세계관과 콘셉트는 해설되어서는 안 된다. 음악으로 느껴져야 한다. 엔믹스는 세계관의 존재 이유를 납득시키는 데에 다시 한 번 실패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믹스팝 음악으로서의 매력 역시 감퇴했다.  섹션이 명확한 대비를 이루며 믹스팝의 기법적 역동성을 극대화했던 전작에 비해 'DICE'는 비트체인지가 주는 반전감이 크지 않다. 지니의 'NMIXX Change Up' 멘트 이후 바뀌는 트랩 비트 변주는 케이팝 내에서는 통상적인 수준이다. 단지 섹션 간의 이음새에 드라마틱한 효과를 주어 낙차를 실제보다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을 믹스팝이라고 칭하기에는 내실이 부족하다.



이뿐만 아니라 사운드 자체의 만듦새 역시 아쉽다. 다채로운 악기 소리를 세련되게 다듬고 선명하게 정돈해 높은 수준의 사운드 디자인을 보여 주었던 전작에 비해 두꺼운 브라스가 이끄는 'DICE'의 비트는 다소 난잡하다. 규진의 프리코러스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소리가 텅 비어 있고, 후반부의 댄스 브레이크에서 하강하는 전자음의 질감은 투박하고 뻣뻣하다.



엔믹스가 선택한 믹스팝이라는 음악적 정체성이 틀린 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대형 자본의 투입이 가능한 JYP와 같은 기획사야말로 양질의 믹스팝을 케이팝 내에서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실제로 데뷔작 'O.O'는 첫 시도에도 믹스팝의 즐거움을 꽤나 높은 수준으로 구현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전작의 장점은 사라지고 단점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잔존하는 후속작 'DICE'는 과연 JYP가 믹스팝이라는 기법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게 한다.



7. 엔믹스와 믹스팝의 미래


따라서 엔믹스는 세 번째 활동이 될 다음 백에서 반드시 이하의 문제를 보완해야만 한다. 첫째, 음악 내부에서의 불명확한 스토리텔링. 둘째, 갈수록 떨어지는 믹스팝으로서의 음악적 역동성. 셋째, 기본적으로 충분히 세련되지 못한 사운드 프로덕션과 디렉팅.



4세대 걸그룹 중에서는 단연 최정상급의 실력을 갖춘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 엔믹스가 이처럼 부침을 겪고 있는 것은 반론의 여지 없이 음악 때문이다. 믹스팝낯설고 불친절한 음악이라는 편견은 엔믹스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단이 아직 엔믹스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일반적인 걸그룹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음악적 비전을 가지고 있고, 그 실현 가능성의 실마리를 조금씩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그 효용성을 입증받아온 믹스팝 기법을 지혜롭게 활용하느냐, 혹은 무의미하게 소모하느냐는 오롯이 4본부의 역량에 달렸다. 걸그룹 프로듀싱에 있어서 전통 명가로 인정받아온 JYP이니만큼, 시행착오 끝에 결국 해답을 찾아내 케이팝 씬에 풍요로운 다양성을 가져다 주리라 기대해 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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